미완의 과거와 영화적 화해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내부자들’의 협잡꾼들 단죄와
‘암살’처럼 밀정을 처단하는 건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닐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길
믿는 일이란 정말로 쉽지 않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약산 김원봉은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2015)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안윤옥, 염석진처럼 허구의 이름인 줄 알았는데, 조승우가 연기한 김원봉은 실제 의열단장 김원봉이었다. 조선독립운동사가 늘 사해평화주의로만 이해되던 시절, 의열단의 행적 자체가 뒷전에 밀린 바도 있지만 결국 북에서 생을 마친 약산의 생애가 그 이름을 낯설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사가 복잡다단한 이념의 파도 속에서 반쪽짜리이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몰랐던 이름. 김원봉은 2016년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에도 등장했다. 이번엔 김원봉을 이병헌이 맡았다. 당대 가장 대표적인 남자 배우 두 명이 맡았는데, 실제 김원봉은 미남자였다고 전해진다. <암살>이나 <밀정>에 묘사되었듯이 거사를 앞두고 독립운동가들은 말끔하게 새 옷과 구두를 맞춰 착용하고, 사진을 남겼다고 한다. 비록 인화된 사진을 찾으러 가지 못할지언정. 유사한 일화는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도 등장한다.

김원봉은 북에서 숙청당했다고 전해진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에 사형당했고 유해도 찾지 못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 홍범도 장군은 사후 78년이 지난 2021년 8월15일, 작년에야 비로소 조국 땅,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김훈 소설 <하얼빈>의 끝에 달린 주석에는 안중근 일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죽었고, 그나마도 비운에 목숨을 잃었다. 편안히 눈감은 경우가 없다. 참담한 현대사의 흔적은 따지고 보면, 과거 완료가 아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암살> <밀정>을 통해 알려진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밀정’이다. 밀정, 유의어를 찾아보니, 간첩, 세작, 첩자, 프락치, 반간, 스파이 등이 있다. 꼼꼼히 따지면 조금씩 의미가 다르지만 어떤 사실을 알아내 남몰래 그것을 빼돌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런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가 생각보다 많다는 게 더 놀랍다. <암살>의 염석진은 독립운동가인 척하면서 정보를 빼돌려 일경에 넘겼다. 밀정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몸에 남은 총알 구멍을 알리바이로 삼아 되레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며 명예까지 가장해 살아간다. 영화는 이 왜곡된 진실에 답답해하는 관객에게 영화적 해갈을 제공한다. 죽은 줄 알았던 명우가 안윤옥과 함께 돌아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라는 김구 선생의 묵은 지령을 준엄히 되뇌며 염석진을 처형하니 말이다.

불발된 사필귀정을 영화가 대신 이뤄줄 때가 있다. 영화가 가진 순기능 중 하나이다. 현실이 정화기능을 하지 못할 때, 현실에서 정의가 구현되지 못할 때, 정의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 이야기를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했던 영화 <26년>도 그런 바람 중 하나였다. 법으로도, 정치로도 충분히 단죄할 수 없었던 학살의 주범을 직접 처단하고자 하는 바람 말이다. 민간인에게 총을 들이대 권력을 잡은 자의 책임을 묻고 사죄를 받기 위해 <26년>의 주인공들은 나선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사필귀정은 쉽지 않다.

2022년 여름 개봉한 영화 <헌트>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민간인 학살의 주범을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지도자를 교체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과격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시간여행처럼 <헌트>는 완료된 역사를 향해 도발적 상상을 제안한다.

영화의 판타지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암울한 현실에 지치고 힘들 때 주저앉지 말라고 격려해주기도 한다. 환상을 통해 북돋워 주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그 격려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26년>이 영화화되던 2012년만 하더라도 ‘그’는 살아 있었고, 요구받은 사죄와 사과를 할 기회가 있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에겐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무런 사과도, 사죄도 없이 미납 추징금 956억원을 남긴 채 2021년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지병이었다.

2017년 장준환 감독의 <1987>을 볼 때,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말은 역사책에서나 다시 볼 법한, 진단이 완료된 과거의 유물이라고만 생각했다. 2022년 오늘의 뉴스에서 살아 있는 연관 검색어로, 이 대사를 따옴표로 다시 보게 될 줄은, 아마 어느 누구도 쉽게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료의 이름을 팔아 일신의 출세를 노렸던, ‘밀정’이라는 단어도 세월을 넘어 현재 진행형으로 새삼스럽게 등장했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적 화해와 환상의 해결이라는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내부자들>의 음란한 협잡꾼들을 단죄하고, <암살>처럼 밀정을 처단하는 건 여전히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닐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기를 믿는 일이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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