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들, 그리고 법의 울타리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의 한 장면.

리플리 증후군의 장본인이기도 한 리플리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많은 리플리씨>의 주인공이다. 리플리는 타인의 삶을 훔치기 위해 거짓과 범죄를 서슴지 않는다. 하이스미스의 소설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본능적 갈망이다. 사회적 관계와 상대적 차별에 의한 산물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숨기고 사는 생래적 질투로 보는 것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하지만 과연 리플리들은 사회와 무관할까? 정한아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안나>를 보면 오히려 리플리는 결코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재능이 있으나 충분한 경제적 뒷받침을 갖지 못한 인물, 유미는 원했지만 가질 수 없는 삶을 얻기 위해 타인의 정체성을 훔친다. 리플리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노린 건 아니었다. 재수해서 곧 갈 대학이니까 잠시 빌려 쓴다. 그런데, 거짓 정체성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돋보이는 삶을 위해, 학력을 위조하고, 명품 옷을 빌려 입고, 좋은 구두와 가방을 신고 등장했더니 그렇게 꽉 막혔던 사회의 냉정한 문들이 활짝 열린다. 학력과 가족을 바꿨을 뿐인데 그녀의 말은 영향력을 갖고 사람들은 그녀를 환대하기 시작한다. 고졸의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의 여성에게 절대 주어지지 않던 기회와 가능성, 기대와 대우가 제공되는 것이다.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의 주인공 이름도 ‘안나’(Anna)이다. 그녀는 독일 출신의 상속녀 행세를 하며 미국 상류층 사교계를 파고들어 어마어마한 사기 행각을 벌인다. 명품 옷을 걸치고, 비싼 저녁을 먹고, 유명인 몇과 어울렸더니 철옹성 같던 뉴욕 사교계가 품을 벌려 그녀를 안는다. 무전취식 및 사기 혐의로 결국 애나는 실형을 받았다. 드라마가 추적하는 것은 뉴욕 상류층의 허약함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이다.

안나들이 벌이는 행위들은 위조, 사기, 불법이며 범죄이다. 상류층의 코드와 법칙, 문법을 알고 나자 그것은 너무 쉽게 해킹된다. 위조된 학위와 가짜 배경이 그들을 돕고 싶은 시혜적 관용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성공한 쿠데타가 혁명으로 둔갑하듯, 그들의 범죄는 유리천장을 뚫는 만능열쇠 구실을 한다. 성공한 리플리들은 그냥 권력자, 가진 자로 살아간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등장했던 이지안이라는 20대 여성은 합법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음에도 방법을 몰라 도망자 신세가 된다. 몇 가지 절차만 거치면 할머니를 요양원에 무료로 모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절차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가진 게 전과밖에 없는 20대 여성에게는 마땅한 권리조차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 와중에 삶에 치이다 보니 사소한 범죄 이력만 더 쌓여 간다. 정보가 권력인 세상에서 먹고살기 바쁜 이지안들은 빚과 폭력에 찌들며 그렇게 도망치듯 살아간다.

고졸 출신 안나에게 주어진 일들은 최저시급도 빠듯한 허드렛일이었고, 러시아에서 온 소녀 안나에게 주어진 것은 차디찬 모멸과 따돌림이었다. 그들이 가짜 안나, 가진 안나를 연기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 연기에 값하는 온기를 준다. 하지만 결국 위장과 연기엔 끝이 있다. 자기 것이 아니었기에 사채 이자만큼 불어난 대가가 청구된다.

문제는 청구된 대가를 지불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다. 법과 제도를 해킹한 성공한 신분세탁자들이 고스란히 우리 사회 상류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그게 문제인 것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응당한 벌을 받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지만 돈 많고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합법의 울타리 안에서 위장과 거래, 연기를 하고 살아간다. 그것이야말로 제도 해킹이며 합법적 신분 절도가 아니면 무엇일까? 유미가 훔친 안나의 학위는 범죄이지만 부잣집딸 안나가 한 줄도 쓰지 않고 사들인 대리논문은 범죄가 되지 않는다. 다시 돈으로 회유하면 없던 일이 되니까.

속이는 게 아니라 들키는 게 문제라면, 그래서 지안이들처럼 모르는 사람만 자꾸만 법의 경계로부터 밀려나 멀어진다면, 이는 단순한 욕망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성공한 신분 위장은 문제 삼지 못하는 세상, 그게 공정의 탈을 쓴 약탈이다. 돈과 권력, 합법적 유통 정보를 가진 사람들은 지안이들이 모르는 은밀한 정보를 빼돌려 점점 더 많은 돈을 얻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채워 간다. 그게 실력이라고 말한다. 오늘도 성공한 리플리들은 실패한 안나들을 비웃는다. 법은 드라마 속 안나들은 처벌하지만 현실의 안나에겐 울타리가 되어 준다. 공정과 원칙이 헛헛해지는 이유이다.


Today`s HOT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