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컬트 여행지

(20)바이칼 호수 알혼섬

알혼섬 불한곶의 전경. 바이칼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신성한 곳이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백야로 사위는 훤하다.

알혼섬 불한곶의 전경. 바이칼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신성한 곳이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백야로 사위는 훤하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결론과 얼마나 비슷한지 계속해 보자.

두 사람은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산다.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는 어느 날 하이도리에게 백조의 옷을 한번만 입게 해달라고 조른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아이가 열한명인데 무엇이 걱정인가하고 하이도리는 아내에게 옷을 준다. 옷을 입은 아내는 백조로 변했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유르트의 천장 구멍을 통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바이칼의 ‘백조와 사냥꾼’과 우리네 ‘선녀와 나무꾼’은 무슨 연관을 갖는 것일까? 이와 비슷한 예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신라 경문왕 고사가 사실은 현 터키지역의 고대왕국 프리기아의 미다스왕 고사와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이 이야기들은 단지 다른 두 지역에서 비상한 이야기꾼들이 독창적으로 창작한 설화일 뿐일까? 아니면 두 지역은 알려지지 않은 강력한 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의문을 품고 시베리아의 중심, ‘영혼의 집’이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 알혼섬으로 떠났다.

알혼섬 남부. 인구의 대부분이 모여사는 후쥐르마을로 가는 길이다. 알혼섬은 남북 길이 70㎞가 넘는 큰 섬이다.

알혼섬 남부. 인구의 대부분이 모여사는 후쥐르마을로 가는 길이다. 알혼섬은 남북 길이 70㎞가 넘는 큰 섬이다.

데자뷰 또는 낯익음

티베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세상으로 모든 것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바이칼은 시베리아의 중심에 위치해 모든 것이 흘러든다. 둘 다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하지(夏至)에 다가갈수록 이곳은 백야로 깊어간다. 지금은 밤 10시. 사위는 초저녁마냥 환하다. 나는 지금 알혼섬의 불한곶에 서있다. 호수라기에는 너무도 넓은 바이칼이 바다마냥 누워있고, 호수를 둘러싼 산들의 계곡으로부터 시간당 풍속 160㎞의 ‘사르마’가 날리고 있다.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것은 4m짜리 파도가 치는 바이칼에서만 가능하리라.

불한곶은 호수 위에 불쑥 솟은 두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불한은 우리말로 ‘밝은 칸’이라는 뜻이니 천신이자 단군이라 할 수 있다. 불한 바위는 그런 곳이었다. 주변에는 우리네 당산나무랄 수 있는 세르게가 있고 그 세르게에 걸어둔 색색의 헝겊 자아라가 바람에 미친듯이 나부낀다. 뭔가 불길한 느낌과 함께 익숙하다. 어린 시절 동구 밖 당산나무를 지나갈 때 느꼈던 그 느낌.

절벽에 서서 불한 바위를 내려다본다. 이곳의 주인인 몽골계 브랴트인들은 이 세상에 99위의 신들이 있다고 믿는다. 55위의 선신과 44위의 악신이 있는데, 13번째 선신이 이곳 불한 바위에 거처한다고 한다. 언뜻 어둠이 깔리는 불한 바위 위로 무엇인가 앉아있는 듯하다. 그것은 내 몸 속 유전자 깊숙이 담겨있는 종족에 대한 기억의 파편인지, 아니면 생면부지의 사물에게서 느끼는 알 수 없는 사진가의 데자뷰인지 가늠할 길 없다. 허공을 맴도는 대륙의 영혼들이 이곳을 집삼아 내려앉는다는 자시(子時)에 나는 내 살갗의 소름을 달래며 숙소로 돌아갔다.

세상의 끝

이른 아침 한기를 느끼며 선잠을 깼다. 밤새 피워놓았던 자작나무 장작은 간데없다. 내가 머물고 있는 니키타의 집은 전 세계 알혼섬 방문을 꿈꾸는 이들의 명소이다. 러시아 탁구 챔피언을 지낸 니키타가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일찍 차를 한 대 대절해 알혼섬의 북쪽 끝 하보이곶으로 가기로 했다. 포장도로는 없고 자작나무 숲을 통과하는 거친 길이란다.

[세계의 컬트 여행지](20)바이칼 호수 알혼섬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서 하보이곶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텐트를 포함한 큰 배낭을 메고 왕복 3일간의 도보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리들 속에서 넬리와 지르소바를 만났다. 서시베리아의 공업도시 톰스크에서 철학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지르소바와 대체의학을 공부하는 넬리는 어린 시절 친구로 함께 배낭여행 중이란다. “차를 타고 싶냐?”고 하니 두말없이 차에 오른다. 벌써 두달째 여행 중이며 차는 공짜로 얻어 타고 잠은 비박을 했단다. 두 사람의 여행 최종 목적지는 알혼섬이었다. “이제 거의 목표에 접근하고 있네요.” 지르소바는 박사과정답게 영어가 좋다.

하보이 곶의 서쪽은 호수 건너편의 산맥이 보이는 ‘작은바다(말로예 모례)’지만 동쪽은 수평선만이 이어진 거대한 ‘큰 바다(발쇼예 모례)’이다. 그리고 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자아라가 날리는 세르게가 서있다. 세상의 끝인 듯하다. 넬리와 지르소바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절벽 위를 돌아다니며 온갖 포즈를 취한다. 마치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듯이 말이다. 나는 혹시나 이 아이들이 추레한 배낭족을 위장한 선녀들이 아닐까 했다. 곧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날 오후 보름동안 씻지 못했다는 두 처자에게 샤워실 딸린 내 방을 한시간 동안 빌려줬다. 물론 옷은 훔치지 않았다.

코리의 전설

하보이곶으로 가는 길에 만난 넬리와 지르소바. 1000㎞ 떨어진 톰스크에서 걷다시피하며 이곳까지 왔단다.

하보이곶으로 가는 길에 만난 넬리와 지르소바. 1000㎞ 떨어진 톰스크에서 걷다시피하며 이곳까지 왔단다.

이곳 브랴트 사람들 사이에는 먼 옛날 동쪽으로 이주한 코리족의 전설이 전해 온다. 이들이 칭하는 코리를 우리 학계에서는 ‘고리’, ‘맥’의 동음어라 생각한다. 고리는 ‘동명’이 출생한 나라로 ‘북부여’의 다른 이름이고 그가 세운 나라가 부여이다. 그런데 동명은 고구려의 ‘주몽’과도 겹친다. 부여와 고구려는 시조설화에서 동일하다. 시대와 나라가 다른데 시조설화는 같다. 이 혼란스러움은 브랴트인들이 이야기하는 코리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면 명확해진다.

먼 옛날 바이칼에서 대흥안령까지 이어지는 초원지대의 코리족이 만주지역까지 내려와 나라를 세우니 바로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고리국’이다. 그 고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부여를 창업하고, 고구려는 부여에서 출원하였으니 동명에 대한 설화는 코리족들의 전매특허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 형성에 큰 지분을 가진 코리족의 ‘백조와 사냥꾼’ 설화는 농경사회로 진입한 오늘의 우리에게 ‘선녀와 나무꾼’으로 윤색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혼섬과 바이칼 호수는 오늘날 우리의 지리적 상상력보다 가깝다. 1921년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본거지이기도 했고,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무대이기도 했다. ‘소설 단’으로 유명했던 봉우 권태훈은 젊은 날 걸어서 바이칼을 20번도 넘게 밟았다고 한다. 하물며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쾌속으로 달리는 요즘에야 이 거리는 그야말로 지척일 뿐이다. 아니 조만간 서울에서 평양을 지나 곧바로 이곳에 도착할 날이 온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대륙으로 확장될 것이다. 넬리와 지르소바는 떠나고 나는 또 홀로 되었다. 불한곶으로 나가 다시 또 해가 지는 바이칼 호수를 보며 생각한다. 먼 훗날 내가 죽어 영혼이 남게 되면 이 ‘영혼의 집’에 방 하나라도 분양받아야겠다고 말이다.

〈사진·글 이상엽|다큐멘터리사진가 http://image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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