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왕실 왕세자와 불화 “허, 이래서야…”

도쿄 | 박용채특파원

근엄하기로 소문난 일본 왕실이 뒤숭숭하다. 왕실 분란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 난무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최근 몇년 새 일본 왕실의 분란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최근의 불협화음은 왕실 서열 1, 2위인 현 아키히토(明仁·75) 일왕과 차기 일왕인 나루히토(德仁·48) 왕세자 간의 갈등으로 좁혀지는 양상이어서 일본 사회 전체가 어수선한 모습이다. 이른바 현 임금인 ‘주상’과 대통을 이어받을 ‘동궁’ 간의 분란인 셈이다.

2008년 새해를 맞아 단란한 한때를 지내는 일본 왕실. 아키히토 일왕 부부를 중심으로 왼쪽에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오른쪽은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부부. 앞줄 왼쪽 어린이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외동딸 아이코. 나머지 3명은 아키시노노미야의 2녀1남이다. 현 왕실 전범에 따르면 아키시노노미야의 아들(사진 아랫줄 중간)이 나루히토 왕세자에 이어 왕위계승 순위 2위다. /일본 궁내청 제공

2008년 새해를 맞아 단란한 한때를 지내는 일본 왕실. 아키히토 일왕 부부를 중심으로 왼쪽에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오른쪽은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부부. 앞줄 왼쪽 어린이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외동딸 아이코. 나머지 3명은 아키시노노미야의 2녀1남이다. 현 왕실 전범에 따르면 아키시노노미야의 아들(사진 아랫줄 중간)이 나루히토 왕세자에 이어 왕위계승 순위 2위다. /일본 궁내청 제공

이번 갈등의 외견상 명분은 아키히토 일왕의 손녀를 둘러싼 것이다. 발단은 지난 13일 궁내청의 하케다 신고(羽毛田信吾) 장관의 기자회견이었다. 하케다 장관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왕세자 내외가 딸 아이코(愛子) 공주를 데리고 일왕을 방문하는 횟수가) 최근 1년간 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 문제는 좀체 외부에 공표하지 않는 왕실의 관례로 볼 때 전대미문의 발언이다.

발언의 뒷배경은 이렇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6년 12월 생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아이코는 유치원 생활을 갓 시작한 데다, 감기에 자주 걸려 우리와 만날 기회가 적은 것이다. 언젠가는 만날 기회가 늘어 단란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간접적으로 왕세자 내외에 불만을 표시했다. 왕세자는 두달 후인 2007년 2월 회견에서 “아이코에 대한 폐하의 심경을 소중히 받아들여 앞으로는 폐하와 (아이코가)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하케다 장관의 발언은 왕세자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하케다 장관은 “전년에 비해 지난해는 (방문 횟수가) 약간 줄었고, 공식행사 외에 왕세자 자의로 아이코 공주가 폐하를 방문한 것은 1년에 두세 차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또 “발언한 만큼 실행을 했으면 한다” “폐하는 황태자 시절 당시 쇼와(昭和) 천황이 도쿄에 계실 때는 가능한 한 가족 단위로 매주 한 차례씩 찾았다”고 덧붙였다.

궁내청 장관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왕세자를 겨낭한 발언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일은 사실상 일왕이 왕세자에게 보낸 경고나 다름없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왕세자가 딸 아이코를 데리고 입궐한 것은 13~14차례다. 그러나 대부분은 왕실 행사에 따른 공식적인 것이었으며, 왕세자의 자의에 의한 방문은 3차례에 불과했다.

하케다 장관의 발언에 대해 나루히토 왕세자는 생일을 이틀 앞두고 21일 열린 생일 기자회견에서 “폐하의 아이코에 대한 배려는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면서 “입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가족간 문제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얘기하는 것은 삼가고 싶다”고 직접 대응을 피했다.

문제는 과연 하케다 장관이 손녀를 만나지 못하는 일왕 부부의 섭섭함을 전달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발표를 했겠느냐는 것이다. 섭섭함만이라면 굳이 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힐 까닭이 없다는 게 이유다.

일본의 왕실 전문가들은 이번 분란의 궁극적인 요체는 마사코(雅子) 왕세자빈에게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마사코는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도쿄대 법대,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을 나온 재원으로 일본에서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관 활동을 했다.

나루히토 왕세자 일가 모습.

나루히토 왕세자 일가 모습.

나루히토 왕세자가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 똑똑하고 지성미 넘치는 마사코에게 반해 수년간 프러포즈를 하며 기다렸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1993년 나루히토·마사코의 결혼에 일본 사회는 환호했다. 마사코의 등장으로 초보수집단인 일본 왕실도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부풀었다.

그러나 마사코의 왕실 생활은 원만치 않았다. 여성의 조신함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왕족들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강조하며 지나치게 튀는 마사코의 모습이 탐탁할 리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왕손도 낳지 못했다. 마사코는 결혼 8년 만인 2001년 외동딸인 아이코를 낳은 뒤 더 이상의 후사를 잇지 못하고 있다. 만세일계를 주장해 온 왕족들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결격 사유였다.

안팎의 조여옴에 마사코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적응장애’라는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을 오가는 처지가 됐다. 2004년에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공식 기자회견에서 “일부 왕족 중 마사코의 인격을 부정하는 발언이 있다”고 드러내놓고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마사코는 현재도 요양을 명분으로 왕실의 공식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마사코와 관련한 일본 사회의 시각 변화다. 일본 사회는 당초 마사코를 ‘황실에 갇힌 나비’로 표현하며 우울증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가 일고 있다. 일본 사회는 당초 2004년 나루히토의 발언에 대해 마사코를 못마땅해 하는 왕실 내 일부 보수원로들에 대한 반론으로 여겨 왕세자 부부의 처지에 이해를 표시했지만 최근에는 일왕을 직접 겨냥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왕세자 부부에게 부정적으로 흐르는 양상이다. 한 관계자는 “왕실에서 왕세자빈을 부정할 수 있는 인물이 왕세자를 빼면 일왕 부부 외에는 없는 것 아니냐”고 귀띔했다.

일본 사회에서 일왕의 존재는 신(神) 이상이다. 아무리 왕세자지만 일왕 비판은 금기 중 금기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에따라 언론도 요즘은 마사코에게 냉정한 쪽으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일본 주간지들은 요즘 마사코의 동정을 시시콜콜 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도쿄에서 쇼핑을 즐기고, 미쉘린의 별 3개짜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사진을 주간지에 게재했다. 동시에 크리스마스 때는 왕세자 일가가 동생집을 방문해 저녁을 즐겼다고 전했다.

반면 연말에 예정됐던 일왕 부부에 대한 인사는 중지했다. 1월1일 왕실의 신년 축하행사에는 오전만 참석한 채 오후에는 동궁 처소로 돌아가 양친들을 초청해 함께 지냈다고도 전했다. 몸 상태를 내세워 공식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은 마사코가 사적 외출을 즐기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성 기사들이다.

공식행사에 10년째 참여하지 않는 마사코에 대해서도 ‘책임감이 없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미 사망한 영국 왕실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왕실 내 비판세력이 많았음에도 오히려 공식행사 등에는 더욱 열정적으로 참여한 것과 비교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궁내청 장관이 이번에 기자회견을 한 것도 이 같은 언론의 보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있다. 왕실이 중요시하는 ‘어른들에 대한 예의’는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사적으로 할 것은 다하고 다니는 것에 대한 불편함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경솔함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마사코를 데리고 일왕 부부를 자주 찾아보겠다고 약속했으면 실행을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진보적인 아사히 신문은 나루히토 왕세자의 회견에 대한 해설 기사를 통해 “최근 수년간 폐하는 왕실의 기본적 자세에 대해 황태자와 국민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보냈지만 황태자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며 “황태자는 성의있는 말과 행동으로 대답하고 설명해 스스로 그리고 있는 미래의 왕실상을 적극적으로 말해주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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