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사후30주년

“성장·개발 향수 떨쳐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정리 | 김재중·유정인기자

대담 /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 김호기 연세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73)는 박정희 정권 시절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의해 왜곡된 근대화의 산물로 비판했다. 그런 인식은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 세력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 안 교수는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일제가 없었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주 더디게 진행됐을 것이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변신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곧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한 박정희 정권의 독재 불가피론을 낳았다. 안 교수가 대표적인 박정희 옹호자로 자리매김한 배경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61년에 대학 4학년이었던 안 교수와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79년 대학 생활을 시작한 김호기 연세대 교수(49)가 ‘우리 안의 박정희’를 주제로 만났다. 두 사람은 박정희 시대의 공과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도 이제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대담은 지난 24일 경향신문사 인터뷰실에서 이뤄졌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왼쪽)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24일 ‘우리 안의 박정희’를 주제로 대담을 마친 뒤 경향신문사 앞 정동길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기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왼쪽)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24일 ‘우리 안의 박정희’를 주제로 대담을 마친 뒤 경향신문사 앞 정동길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기자

김호기(이하 김) = 안 선생님은 박정희 시대를 가로질러왔고 지식인으로서 많은 활동을 해오셨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명과 암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볼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한다.

안병직(이하 안) = 박정희 시대에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느냐를 먼저 짚어야 한다. 박정희 시대에 경제가 연 8%씩 성장했는데 세계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다. 박정희 시대가 산업화를 이루기 전 한국은 사실상 농촌사회였다. 공업화가 성공하면서 인구 대부분이 도시와 2차산업으로 유입됐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자립경제를 형성할 수 있는 모멘텀을 정착시켰다. 그 전까지 한국경제는 전혀 자립성이 없었다.

안병직 교수 “박정희의 권위주의는
경제발전위한 것…군국주의·나치즘과 달라”

김 = 경제적 자본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다. 비교사적 관점에서 보면 산업화는 독일·일본 모델과 스칸디나비아 모델이 있다. 독일·일본 모델은 경제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가 결합됐고,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주의가 결합됐다. 박정희 정권은 독일·일본 모델로 갔다. 보수적 사회과학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정치적 권위주의는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경제성장이 민주주의와 반드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안 = 한국에서 중산층 형성과 자유기업제도 확립 등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조건이 갖춰진 것은 86년 이후로 봐야 한다. 그 이전의 한국 민주주의는 이승만 박사가 허허벌판에 가장 발전된 민주적 제도를 이식시키려던 것이다. 건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돼 있지만 이를 시행할 사회경제적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의 권위주의는 일본 군국주의나 독일 나치즘, 이태리 파시즘과 많이 다르다. 한국의 권위주의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권위주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권위주의가 아니면 당시 민주주의를 지켜낼 방법이 있었는가.

김 = 자본주의 초기 산업화에서 정치적 권위주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신체제는 명백하게 반민주주의적 체제였다. 70년대 일련의 긴급조치로 미셸 푸코가 말하는 ‘억압적 감시체제’가 절정에 달했다. 박 정권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걸었지만 말이 그렇지 한국적 민주주의가 비서구 사회의 군사독재와 뭐가 다른가.

안 = 스웨덴·스위스 모델을 말하는데 이들이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킬 수 있는 여건이었다. 우리는 이런 기반이 없었고 남북이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처럼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양립시키기 힘든 조건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고 억압된 것에 대해서는 말할 바가 없지만 저항의 여지를 줬기에 민주화 세력이 성장해 올 수 있었다. 어찌보면 민주화 세력을 이승만과 박정희 체제가 양성한 것이다. 민주화 세력은 학생과 노동자·농민 일부가 주류인데 이들은 이승만·박정희의 교육정책, 박정희의 산업화에서 태어난 아들들이다.

김 = 각종 여론조사에서 해방 이후 가장 존경할 만한 정치적 지도자로 박정희를 꼽는 사람들이 압도적이다. 박정희 시대가 명암이 분명한데 왜 국민은 30년이 지난 현재도 그를 그리워한다고 보는가.

안 = 박 대통령이 권위주의를 했다는 것은 맞지만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게 그전에 있었나. 인기투표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꼽은 사람이 50~60%로 압도적인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려는 인간의 심성에서 나온 결과라고 본다. 다만 지금도 그가 한 것처럼 해도 좋으냐라고 물으면 대답은 전혀 다를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공이 있다는 것과 오늘날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김 = 우리 안에는 ‘박정희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살아있다. 성장만능주의, 개발지상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 군사주의 등이다. 우리 사회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데 긍정적 영향보다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 = 박 대통령이 불가피하게 권위주의를 행사하고 독재적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을 많이 창출한 것이 어두운 면의 핵심이다. 우리 민주화 세력들에게 만들고 싶은 국가와 사회를 물었을 때 이상적 모습을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현실적 유산을 가지고 만들 것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약하다. 현실에 정착하려면 인정할 건 인정하고 비판할 건 비판해야 하는데 과거의 어떤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사상적으로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는 분위기다. 진보세력이 현실의 확고한 기반에서 앞으로 나가는 데 계속 장애를 일으킨다.

김 = 진보진영이 박정희 정부의 물질적 성공 부담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국민 2만달러 시대’를 내세운 게 단적인 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회를 지배한 성장만능주의를 성찰할 때가 왔다고 본다.

안 = 오늘날의 모든 문제가 박정희 시대로부터 유래한다고 보는 것은 문제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인간들이다.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 설정이나 나아갈 방향 모색에 있어 과거에 너무 구애되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한국이 경제와 민주주의가 발전한 사회로 나아가려면 두가지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는 반공주의다. 반공주의는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공동체 일원에서 배제하자는 것이다. 대신 진보진영은 공동체를 부정하면 안된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제일 부정하는 사상이 종북주의 아닌가. 성장일변도·경제일변도라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성장도 해야 하고 경쟁도 해야 한다. 성장을 안하면 안정적 일자리 창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호기 교수 “이명박정부 경제정책은 개발독재의 새로운 버전
…성장·분배, 개발·보전 함께가야”

김 = 이명박 정부는 감세·민영화·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이 있지만 4대강 정비에서는 발전국가적·토건국가적 발상이 드러난다. 이 정부의 경제정책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즉 ‘발전국가의 신자유주의적 버전’이 아닌가.

안 = 정확한 지적이다. 다만 한국 경제는 개발경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접목시켜 봤자 발전국가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두가지를 조화시켜야 신자유주의도 한국에 정착이 된다. 역사가 호호탕탕하게 흘러가는데 우리 맘대로 되겠는가. 나는 4대강 사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불황 때는 돈을 살포하더라도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홍수로 인한 국부 낭비를 막고 물을 살릴 수 있다.

김 = 우리 사회가 박정희 시대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로 넘어갈 수 없다고 본다.

안 = 박정희 시대를 극복하려면 그 시대를 상대화하고 역사적 유물로 위치시켜야 한다. 동시에 박정희 시대를 다루는 주체가 박정희 시대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크게 보면 박정희가 근대화를 했으니 우리는 선진화를 해야 한다. 그때는 권위주의를 했지만 이제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그때는 남북대결을 했지만 이제는 북쪽이 사실상 붕괴됐으므로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다.

김 = 보수진영은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만 일방적으로 의존할 게 아니라 성장만능주의를 넘어서서 성장과 분배, 개발과 생태보전이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 진보진영도 박정희식 패러다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진보의 성취 등으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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