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원효로 윤노파’ 피살 사건

김종목 기자

아직도 미제사건으로 남아

1981년 7월22일 ‘원효로 윤보살’로 불리던 점술인 윤모씨(당시 71세)와 수양딸(당시 6세), 가정부(당시 19세)가 둔기로 난타당하고 목이 졸려 숨졌다. 숨진 윤씨는 복비를 수백만원씩 받을 정도로 용했다. 또 선행도 널리 하고 사업수단도 좋아 유명했다. 수억원대 재산가의 돈을 노린 계획적 범행으로 보여 범인은 곧 잡힐 듯했다.

[어제의 오늘]1981년 ‘원효로 윤노파’ 피살 사건

조카 윤모씨와 그 부인 고모씨가 8월4일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 수사가 본격 시작됐다. 용산경찰서는 주변인 중 용의자를 5~6명으로 압축했다. 조카며느리 고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경찰은 8월6일 고씨를 범인으로 지목해 연행했다. 구속영장은 17일 발부됐다. 경찰은 “고씨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9월28일 첫 공판에서 고씨는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했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10일 동안 불법감금 상태에서 조사받았다고 주장했다. 호텔에서 옷이 벗겨진 채 수갑이 채워지고, 물고문을 당했고, 전신을 얻어 맞았으며, 자백하지 않으면 죽어 나갈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상대가 여자이고 남편이 검찰청 계장이므로 고문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반박자료를 돌렸다.

검찰은 법정에서 진술조서를 주 증거 자료로 제시하며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문과 협박에 의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졌으므로 임의성이 없어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검찰은 항소했지만 2심, 대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이 났다.

고씨에 대한 무죄는 획기적 판결로 평가됐다. 당시 만연된 고문에 의한 자백을 최초로 배척한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적법하고 정당한 수사절차 요구, 정황증거를 배척하고 직접증거만을 인정하는 채증법칙 정립의 계기가 됐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회한과 오욕의 암흑시대에도 아주 드물게 좋은 판결들이 있었다”며 80년대의 소신 판결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찰사에선 치욕의 사건이다. ‘고문 경찰’도 모자라 ‘도둑 경찰’의 멍에를 써야 했다. 고문 시비가 한창이던 10월17일 수사팀의 하모 형사가 현장증거품인 윤씨의 정기예금증서 3장을 빼돌리다 적발된 것이다. 용산경찰서장 등 4명이 직위해제되고, 이후 수사경찰 자질 향상 방안과 수사비 인상 개선책이 추진되기도 했다. ‘윤노파 피살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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