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공’이 ‘큰 공’을 흔들다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탁구에 대한 홍군의 열의는 대단했다. 대형 탁구대는 식사시간이면 식탁으로 바뀌었다. 배트(라켓)와 공, 네트로 무장한 4~5명의 비적(匪賊·홍군)이 ‘빨리 밥먹으라’며 동료들의 식사를 재촉했다. 탁구를 계속하려고 안달이었던 것이다.”(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서)

1936년 홍군(紅軍·중국공산당 군대)은 3년의 대장정을 마치고 옌안(延安)에 도착한다. 국민당군의 토벌작전에 1만2500㎞를 쫓겨온 것이다. 홍군은 전력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때 탁구는 힘겨운 객지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당시 탁구를 배운 마오쩌둥(毛澤東·사진)은 펜홀더·셰이크핸드 그립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오른팔을 다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재활훈련의 하나로 탁구 삼매경에 빠졌다. 1959년 4월이었다. 22살의 룽궈퇀(容國團)은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 헝가리의 시도 페렌크를 꺾고 남자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룽궈퇀이 외친 구호는 지금도 중국 인민의 ‘희망의 메시지’로 사랑받고 있다.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반드시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人生有幾回轉 此時不搏何時搏).”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작은 공’이 ‘큰 공’을 흔들다

중국은 홈에서 열린 1961년 세계대회에서도 남자단체와 남녀단식을 석권한다. 1959~1961년 사이 대약진운동 실패와 전국을 강타한 기근으로 무려 2000만명이 희생됐다. 탁구는 도탄에 빠진 ‘인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비춰준 것이다.

1971년 4월4일, 세계선수권이 열리던 일본 나고야. 19살 미국선수 글렌 코완이 중국선수단 버스를 탄다. 그는 중국선수 좡쩌둥(莊則棟)과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눴다. 기자들이 코완에게 “중국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코완은 “물론”이라고 답했다. 4월6일, 이를 보고받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입을 모았다. 그날 밤 수면제를 먹고 잠에 취해가던 마오 주석이 수간호사를 불렀다.

“외교부에 전화해서 미국선수단 초청하라고 하게.”

마오 주석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핑퐁외교의 서막을 연 것이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코리아>를 보니 불현듯 1991년 지바 세계대회가 떠오른다. 그러고보면 우리에게도 탁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반목을 일삼던 남북의 젊은이들이 ‘46일간의 소중한 통일’을 이루게 했던 것도 탁구요, 하나된 힘으로 중국을 넘어선 것도 탁구이다. 저우언라이의 말이 떠오른다.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을 흔들었다(小球轉動大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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