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길, 정치인의 길

박래용 정치에디터 겸 정치부장
[정동에서]모범생의 길, 정치인의 길

모범생은 친구랑 싸우지 않는다. 숙제가 있으면 놀지 않는다. 날라리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다. 욕도 안 한다. 무엇보다 공부를 잘한다. 말이 쉽지 모범생의 길이 쉬운 게 아니다.

안철수는 모범생이다. 서울대 의대-펜실베이니아대 MBA-잘나가는 벤처 기업인으로 일탈을 모르고 살아왔다. 싸워 본 적도, 날라리들과 지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정치에 입문한 뒤 혼수상태다. 통합신당 창당은 밀실에서 뚝딱 합의했다가 당이 개인의 소유물이냐는 비판을 받았다. 6·15, 10·4 남북선언은 정강에서 삭제한다고 했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자 몰랐던 일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실무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잘못을 시인하는 용기도 없었고, 책임지는 자세도 보여주지 못했다. 안철수는 즉시 정강을 초안한 윤영관을 잘랐어야 했다. ‘범생이’는 그러지 못했다.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은 신당 전체를 꽁꽁 결박해 놓고 있다. 모범생은 약속을 지키려 한다. 미생(尾生)은 폭우가 내려 물살이 밀려와도 끝내 다리 밑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교각을 끌어안고 죽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미생의 약속을 작은 명분에 집착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례로 들고 있다. 장자는 “쓸데없는 명분에 빠져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라고 했다.

자리가 자리다보니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묻는다. 안철수는 어떤 사람이냐고. 나도 모르겠다. 또 묻는다. 안철수는 깜냥이 되냐고. 나도 알고 싶다. 안철수는 ‘새 정치’를 기치로 독자 창당에 나선 지 37일 만에 깃발을 내렸다. 현실적 한계에 부닥쳤거나, 밑천이 바닥났거나이다.

신당의 지지율은 이제 20%대로 추락했다. 그가 몇 번 헛발질을 하는 사이 안철수 효과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안철수는 미디어와 여론조사가 결합한 이미지 정치의 대표적 사례다.”(서울대 강원택 교수), “정치적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받기 좋은 상품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안철수는 곱씹어 들어야 한다. 지금 안철수의 ‘새 정치’는 약속을 지키는 정도의 수준이다. 약속을 지킨다는 정치는 유리그릇과 같다. 정치의 원형이 윤리라면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했어야 한다. 은총은 만인에게 줄 수 있지만 정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 논쟁과 충돌을 피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었다. 개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한국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안철수라는 인물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안철수가 예뻐서가 아니다. 안철수가 없었더라도 홍길동이든, 이몽룡이든 국민들은 다른 누군가를 찾았을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이 맞아떨어지는 꼭짓점에 안철수가 있었다.

통합신당은 그 가치를 새 정치에서 찾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당의 평균 존속기간은 44개월이었다. 창당 때마다 새 정치를 내세우지 않은 정당이 없다. 너도나도 100년 정당을 호언했지만 포말처럼 사라졌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새 정치냐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새로운 것은 없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 듯 정치판에 이제까지 없던 발명품을 내놓을 수는 없다. 정치인 안철수는 바람이 빠졌어도 ‘안철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대선 때 ‘안철수 현상’은 상식과 정의, 공유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어제 130석의 통합신당이 출범했다. 신당은 이제 보여줘야 한다. 별다른 것을 새로 하라는 게 아니다. 국민들이 기성 정치권에서 눈을 돌렸던 이유, 거기서 새 정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대선 때 국민들이 안철수에 기대했던 것들이다. 국민이 열망했던 것, 기존에 하려 했던 것, 하려다 못했던 것을 하면 된다. 반(反)박근혜, 반새누리당만으로는 안된다. 그를 뛰어넘어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와 민생을 구하고,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갈증을 풀어줘야 한다. 신당에 일말의 기대를 거는 이유는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새 정치에 대한 체감지수를 조금씩 높여 나가야 한다.

모범생의 삶은 끝났다. 꽃가마에 앉아 신발에 흙 한점 묻히지 않고 정치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정치인은 현실을 본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고 선거는 이겨야 한다. 안철수의 맹성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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