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국기문란’에 면죄부

정제혁·정희완·구교형 기자

국가기밀 불법으로 빼내 선거 이용해도 고작 벌금 500만원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 측이 국가 기밀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을 불법으로 입수해 조직적으로 선거에 활용한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러나 검찰은 이 같은 ‘국기문란’ 범죄의 일단을 확인하고도 새누리당 의원 한 명만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하고 관련된 나머지 여당과 정부 인사들은 모두 무혐의 처분해 면죄부를 줬다. 야당은 즉각 반발하며 특검으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밝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유출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이현철 부장검사)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을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하고, 새누리당 김무성·서상기 의원, 권영세 주중 대사,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등은 무혐의 처분했다고 9일 밝혔다.

▲ 검찰, 조직적 선거 활용 새누리당 김무성·권영세 등 무혐의
최초 누설 정문헌만 약식기소… 야당 “특검 진상규명” 반발

▲ 한·미 FTA 문서 유출자 징역형과 형평 안 맞아
새정치 “친박 인사들 봐주기… 권력의 검찰 입증”

검찰 수사 결과 정문헌 의원은 2009년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재직하며 열람한 회의록 내용을 대선 직전 김무성 의원(당시 박근혜 후보 중앙선거대책위 총괄선대본부장)과 권영세 대사(당시 종합상황실장)에게 전달했다.

김 의원은 대선 직전인 2012년 12월14일과 19일 박근혜 후보의 부산 찬조유세 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회의록 일부를 인용했다. 권 대사는 2012년 12월10일쯤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기자 등과 만나 회의록 내용 일부를 발설했다.


당시 박 후보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대대적인 반문재인(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캠페인을 펼쳤다. 국가 기밀을 불법 유출해 색깔론으로 덧칠한 뒤 대선에 활용한 것이다. 게다가 국가 정상 간 회담 내용을 정파적 필요에 따라, 특히 선거에 활용할 목적으로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국제 외교사에 전례를 찾기 힘든 폭거로 평가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앞으로 다른 나라 정상이 한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편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정 의원 등의 행위는 국익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정 의원을 약식기소하는 데 그쳤다. 약식기소는 법원의 정식 재판절차도 없이 벌금형을 내리면 족할 정도로 사안이 경미하다는 뜻이다. 김 의원, 권 대사는 공무상 지득한 기밀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국기문란’에 면죄부

검찰의 이번 처리 기준대로라면 다음 대선 때 정파적 필요에 따라 한·미, 한·일 정상회담 내용을 불법으로 빼내 선거에 활용해도 고작 벌금 500만원만 물면 끝난다는 얘기가 된다. 검찰의 이번 처분 결과를 놓고 ‘국가 기밀을 활용해 불법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유승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이번처럼 기록을 난도질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벌어지면 국가지도자 누구도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사 사건과의 형평성도 문제가 되고 있다. 과거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6차 협상을 앞두고 국회 FTA특별위원회에 보고된 대외비 문서 등을 시민단체에 전달한 혐의로 최재천 당시 민주당 의원실 비서관 정모씨를 기소했고, 정씨는 대법원에서 징역 9월이 확정됐다. 당시 검찰은 최 의원의 국회 사무실도 압수수색했다. 그랬던 검찰이 사안이 훨씬 중대한 이번 사건에선 단 한 차례의 강제수사도 없이 정 의원만 약식기소한 것을 놓고 최소한의 형평성조차 팽개친 처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검찰이 서상기 의원과 남재준 전 국정원장을 무혐의 처분한 논리도 옹색하다. 국회 정보위원장이던 서 의원은 지난해 6월20일 국회에서 회의록을 열람한 뒤 기자회견 등을 통해 내용 일부를 공개했다. 당시 서 의원은 열람에 앞서 국정원으로부터 비밀준수 의무를 고지받고 이를 지키겠다는 서명까지 했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지난해 6월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앞에서 NLL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 반역을 알리려고 공개했다”며 회의록 발췌본 및 전문을 공개한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공개된 회의록 전문 어디에도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내용은 없다.

이번 수사결과를 놓고 당장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정권의 사익을 옹호하는 데 급급한 정치검찰의 민낯이 또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비판이 나온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박(친박근혜) 인사들에게 면죄부를 준 불공정 수사”라고 반발했다. 박광온 대변인은 “국민의 검찰이 아닌 권력의 검찰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범계 원내대변인은 “19일 상설특검법이 발효되면 특검으로 진상을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재단도 논평에서 “ ‘친박무죄’의 자의적 잣대를 보인 정치검찰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명백한 범법행위를 무려 1년간 수사한 결과가 무혐의라면, 검찰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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