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 영정은 찾았는데 청와대가 잃어버린 안중근 유묵은?

이기환 선임기자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형인 익안대군 이방의의 영정. 영조 때 화공 장만득이 원래 전해지던 영정을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2000년 도난당했다가 18년만에 회수됐다. |문화재청 제공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형인 익안대군 이방의의 영정. 영조 때 화공 장만득이 원래 전해지던 영정을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2000년 도난당했다가 18년만에 회수됐다. |문화재청 제공

2000년 1월 7일 충남 논산 연산면 전주 이씨 종중의 영정각에 고이 모셔놓은 영정 한 점이 감쪽같이 도난됐다.

태조 이성계의 셋째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1360~1404)의 영정(충남 문화재자료 제 329호)이었다. 이 영정은 이후 일본에서의 문화재 세탁을 거쳐 국내로 다시 돌아온 뒤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달 회수됐다.

문화재청은 10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8년만에 회수된 ‘익안대군 영정’의 반환식을 열었다. 문화재청이 밝힌 익안대군 영정 도난사건의 전모를 풀어본다.

■도난-문화재세탁-국내반입-실종-회수

18년전 당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의 신분으로 익안대군 영정 도난 현장에 출동했던 강신태씨는 “철통 같은 이중 금고를 뚫고 영정을 훔쳐갔다”고 회고했다.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 종가는 현상금 300만원까지 걸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익안대군 영정을 훔친 이는 당대 유명한 문화재 전문털이범인 A(서모씨)였다.

이때부터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익안대군 영정 도난사건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시작된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1976년 청와대에 기증된 보물인데, 언젠가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소유자가 청와대, 도난장소도 청와대라는 것이 부끄러운 대목이다.|문화재청 제공

안중근 의사의 유묵. 1976년 청와대에 기증된 보물인데, 언젠가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소유자가 청와대, 도난장소도 청와대라는 것이 부끄러운 대목이다.|문화재청 제공

A는 훔쳐낸 익안대군 영정을 부산의 골동품 유통업자인 B에게 팔아넘겼다. B는 즉시 이 영정을 들고 일본으로 밀반출한 뒤 현지의 일본인에게 정상적으로 구매한 것처럼 허위거래서를 꾸몄다. 그래야 국내에서 붙잡힌다 해도 선의취득, 즉 “도난문화재인줄 모르고 일본에서 구입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쪽같이 ‘세탁’한 익안대군 영정은 그 해 7월 김해세관을 통해 버젓이 들어왔다.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100년이 지난 문화재의 경우 무관세 혜택을 받는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의 국내환수를 쉽게 하기위해 만든 조항 때문이다. 무사히 영정을 들여온 B는 또다른 업자인 C에게 넘겼다. 그 사이 영정을 훔친 A가 서울중앙지검과 문화재청 합동단속반에 체포되었다.

문화재청 인터넷 사이트의 도난문화재정보란에 기록된 ‘안중근 의사 유묵’ 도난 정보. 소유자가 청와대, 도난장소도 ‘청와대’라 적혀있다.

문화재청 인터넷 사이트의 도난문화재정보란에 기록된 ‘안중근 의사 유묵’ 도난 정보. 소유자가 청와대, 도난장소도 ‘청와대’라 적혀있다.

A의 진술을 통해 수사망이 B에게 좁혀졌다. 문화재 단속반의 최우선 임무는 도난문화재의 무사귀환이다. 범인을 잡아도 문화재를 회수하지 못하면 ‘만사휴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인신구속보다 문화재 회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당시 단속반도 B에게 연락을 취해 “영정을 먼저 단속반에 보내오면 정상을 참작해주겠다”고 설득했다.

B는 “물건은 이미 C에게 있으니 C에게 연락을 취해 ‘물건을 서울로 보내라’고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영정을 끝내 회수되지 않았다. “물건을 가져오겠다”고 한 C가 “지하철 종로 3가역에서 영정을 놓고 내렸다”고 하고는 연락을 끊어버렸다. 단속반으로서는 낭패였다. 결국 검경 및 문화재청 합동반의 수사 끝에 C는 붙잡았으나 B는 도주하고 말았다. 지명수배된 B는 일본과 중국을 전전하다가 4년 만인 2004년 체포됐다. 이로써 도난사건에 연루된 A와 B, C는 모두 붙잡혀 문화재보호법 위반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익안대군 영정은 끝내 회수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영정을 갖고 있었던 C가 “종로 3가역에서 잃어버렸다”고 진술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지난해 마침내 영정의 행방을 찾아냈다. 단속반은 영정 소지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도난된 것이 확실한 문화재이므로 매매가 원천봉쇄돼있다는 사실은 영정 소지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도난문화재를 갖고 있어봐야 골치만 아프다는 것을 잘 아는 소지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밝혔다. 마침내 영정 소지자는 단속반에 D라는 사람을 통해 “반환하겠다”고 제안해왔다. 이로써 익안대군 영정은 도난된지 무려 18년만에 문중의 품에 무사히 돌아오게 됐다.

안평대군의 진필인 <소원화개첩>. 국보(제238호)이다. 안평대군의 호인 ‘비해당’ 낙관이 찍혀있는 데다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진적이지만 2001년 소장자가 집을 비운 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안평대군의 진필인 <소원화개첩>. 국보(제238호)이다. 안평대군의 호인 ‘비해당’ 낙관이 찍혀있는 데다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진적이지만 2001년 소장자가 집을 비운 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익안대군의 얼굴에서 태종 이방원을 살핀다

태조 이성계의 셋째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는 이방원(다섯째·태종)와 이방간(넷째) 등과 함께 개국공신 1등에 든 인물이다. 그러나 정권에는 야심이 없었다. <태종실록>에 실린 익안대군의 졸기를 보면 “성질이 온후하고 화미했다”면서 “손님이 와서 술자리를 베풀어 취기가 올라도 정사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1404년 9월26일)고 했다. 동생인 방원이 임금이 된 후에는 지병으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이번에 회수된 익안대군 영정은 조선 영조 연간의 화가인 장득만(1684~1764)이 원본을 참고해서 그대로 그린 이모본(移摸本)으로 추정된다. “1734년(영조 10년) 영조가 화공 장만득을 불러 영정을 그리라고 했다”는 어필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초상화의 전형적인 화법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부자지간인 태조 어진과의 용모를 비교할 수 있다. 또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동복형제인 정종(둘째 방과)과 태종의 모습 또한 유추해볼 수 있다.

조선중기의 문신 류근(1549~1627)의 영정(보물 제 566호). 1999년 도난된지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찾지 못했다.

조선중기의 문신 류근(1549~1627)의 영정(보물 제 566호). 1999년 도난된지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찾지 못했다.

■‘선의취득은 없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지난 2007년에 문화재보호법 내에 선의취득 배제 조항을 신설해서 도난 문화재의 공소시효를 실질적으로 연장했다”면서 “이에따라 도난 문화재를 사고파는 행위는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무슨 말인가.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 사범의 공소시효는 10년이다. 그러나 이는 문화재 절도나 도굴범에 해당되는 공소시효이다. 지난 2002년부터는 훔치거나 도굴한 문화재를 은닉하고 있는 자도 처벌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 줄 모르고 구입했다”는 변명들이 나왔다. 법의 허점을 노린 주장이었다. 그래서 2007년에는 정재숙 청장이 언급한대로 이른바 ‘선의취득 배제 조항’을 신설했다. 즉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했다”는 선의취득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문화재의 도난신고를 받으면 도난됐다는 공고를 반드시 내게 된다. 그런데 이 공고를 확인하지 않고 문화재를 사들이면 선의취득에 해당되지 않는다. 불법이다. 또 탱화를 비롯한 회화작품의 경우 일부러 출처를 지우거나 낙관을 훼손한 다음에 팔고 사는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역시 불법이다. 결국 문화재 은닉과 거래의 공소시효는 사실상 없는 것이다. 이것이 도난문화재인 익안대군의 영정이 무사히 회수된 이유이다. 도난 및 도굴품을 갖고 있어봐야 사고 팔 수가 없는데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1995년 1월 전남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 중 13점(보물 제1043호)도 도난당했다.보조·진각·정혜국사의 영정 3점만 남았다.

1995년 1월 전남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 중 13점(보물 제1043호)도 도난당했다.보조·진각·정혜국사의 영정 3점만 남았다.

■청와대에서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보물

도난당한 뒤 돌아오지 않은 문화재 중 국가지정문화재(국보와 보물)만 13건(국보 1건 보물 12건)에 이른다. 그 중 안평대군의 진필인 <소원화개첩>은 국보(제238호)다. 안평대군의 호인 ‘비해당’ 낙관이 찍혀있는 데다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진적이다. 그러나 2001년 소장자가 집을 비운 사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도난된 보물 가운데는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뤼순(旅順) 감독에서 쓴 유묵 1점이 특히 눈에 띈다.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글씨(보물 제569-4호)다.

그런데 이 유묵이 사라진 곳이 다름아닌 청와대였다. 1972년 8월16일 보물로 지정된 이 유묵은 4년 뒤인 1976년 3월17일 이도영 당시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이 유묵은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 언제 사라졌는지 시점도 불분명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문화재청 인터넷 사이트의 도난문화재 정보란에는 이 유묵의 소유자가 ‘청와대’이며, 도난장소 또한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청와대’라 기록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체취가 담긴 귀중한 유묵을 도난당한 곳이 다름아닌 ‘청와대’였다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사라진 보물 중에는 전남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 중 13점(보물 제1043호)도 눈에 띈다. 송광사 16조사 진영은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고승 16명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1995년 1월 16국사 영정 중 보조·진각·정혜국사의 영정 3점만 남긴채 13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경찰은 국사전 뒤쪽 흙벽에 지름 1m 가량의 구멍이 난 것으로 보아 절 내부사정을 아는 문화재 전문절도범의 소행으로 추정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1985년 2월 경기 여주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의 상륜부 중 보륜과 보주 부분이 사라졌다.

1985년 2월 경기 여주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의 상륜부 중 보륜과 보주 부분이 사라졌다.

1999년 3월 충북 괴산 소수면 사당에 보관된 조선중기의 문신 류근(1549~1627)의 영정(보물 제 566호)도 도난된지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찾지 못했다. 이밖에도 1985년 2월 경기 여주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의 상륜부 중 보륜과 보주 부분이 사라졌는데, 33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고 있다.

또 상주 정기룡 장군유물 중 ‘유서’ 1점(보물 제 669호·1985년 도난),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보주(보물 제40호·1989년), 황진가 고문서 2점(보물 제942호·1993년),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전적-만국전도 1점(보물 제1008호·1993~4년), 익산 현등사 연안 이씨 종중 고문서(보물 제651호·1999년),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불 복장유물 중 전적(보물 제959-1호·1993년), 예천 대동운부군옥책판(보물 제878호·1990년), 강화 백련사 철아미타불좌상(보물 제994호·1989년) 등이 돌아오지 않는 보물들이다.

정재숙 청장은 “문화재 절도는 단순절도가 아니라 수백 수천년 동안 이어온 문화유산을 한순간에 잃게 하는반역사적인 범죄”라면서 “문화재를 훔치거나 도굴할 경우 영원히 사고 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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