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의 눈물…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나

원익선 원광대학교 정역원 교무

내가 어렸을 때, 생활기록부 항목 중 부모님의 직업을 ‘노동자’라고 써내고 부끄러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부모님이 ‘회사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며 그런 집안의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노동을 천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철들어 노동이 곧 삶임을 알았다. 나아가 1948년 제헌헌법에는 근로자의 노동3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에 더해 ‘이익분배 균점권’까지 담아 노동이 자본과 대등한 관계를 가지도록 하고 있음을 알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노동운동 탄압을 위해 노동3권 앞에 ‘근로조건의 향상’이라는 조건을 붙였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 권한을 침해하지 못한다.

[사유와 성찰]비정규직의 눈물…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나

노동은 수백만년 전부터 인류와 함께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초고>에서 노동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포섭될 때, 인간은 노동 그 자체는 물론 노동생산물, 인간 자신, 그리고 타인으로부터도 소외된다고 한다. 소외는 지금의 자유시장체제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여기서 자유는 인간이 아니라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자유다. 이제 자본은 지구의 자연과 인간, 심지어 인간의 상상력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노예가 된 인간은 자발적 ‘열정’을 쏟아 자본을 섬겨야만 한다.

지구를 거의 정복한 자본의 욕망은 자가 증식을 한다. 돈이 돈을 낳고, 빈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세계는 자본의 왕국이 통치한다. 자본은 원전처럼 분열의 에너지로 왕국을 확장한다. 노동의 효율을 위해 노동자들의 힘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미 이 나라 노동자의 반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통신의 비정규직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이중의 적>에서는 기업은 물론 정규직으로부터도 소외당하는 비정규직의 비애를 보여준다. 비정규직의 눈물이 강이 되어도 자본은 매정하다. 구미지역 최초의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 회사는 2015년 8월 노조결성 세 달 만에 170명의 노조원을 전화 한 통화로 해고했다. 그들은 지금도 차디찬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3권 완전보장”이다. 기업의 불법과 공권력의 기만 앞에서 부조리한 노동의 현실을 맨손으로 전복시켜보겠다는 의지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이 일을 왜 국가의 주주인 국민이 해야 하는가.

‘국가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은 국민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지배의 대상이 아닌 참여의 주체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국가(國家)’라는 말이 의미하듯, 국민의 최고 경전인 헌법에서 그 구성원이 가족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을 괴롭히는 자본의 폭력도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엄연히 국민기본권인 노동3권을 짓밟고 있는데도 국가가 방관한다면 자신의 책임을 포기한 것이다. 오히려 자본과 결탁한 국가는 헌법의 명령을 무시하고, 법률 집행권을 이용하여 자본의 편에 서 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50년 전 전태일이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말은 여전히 현실이다.

그리고 자본이 국가를 무색하게 하는 것은 다단계 하청이다. 노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뻔뻔하게도 중간에서 착취한다. 동일시간에 동일노동을 하면서도 기업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차별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몰아세운다. 10년 평균 산업재해로 죽어간 노동자가 한 해 2400명이다. 여기에는 정규직이 목표였던 젊은 노동자 김용균도 있다.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자본과 국가에 의해 타살당한 것이다.

법 이전에 노동은 인간적 삶의 문제다. 가장은 자신의 노동만으로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이 물음 앞에 비정규직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정치인, 기업가를 포함하는 모든 직장인들은 삶과 죽음의 전 과정을 놓고 보았을 때 비정규직이다. 영원한 직업을 가질 수도 없다. 영원한 자본도 없다. 모든 직장은 한때, 내가 잠시 맡았던 하늘의 소명에 불과하다. 현재 이 순간, 존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없다면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노동이 전부인 인간적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노동선진국의 자세만은 배워야 한다. 영국, 호주, 캐나다가 기업살인법을 제정한 것은 자본의 전횡에 대한 국가의 경고다. 그 법에 앞서 노동자들이 기업 운영에 참여하여 노동의 원래 주인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나마 최소한의 공화국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정부는 노동조합총연맹이 되고, 종교는 노동자를 변호하며, 학교는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치는 세상이 될 것이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