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아빠’의 5년 “사람이 무섭다”

글 장은교·사진 서성일 기자

참사 5주기…귀농 꿈꾸는 ‘세월호 투쟁의 상징’ 김영오씨

[커버스토리]‘유민 아빠’의 5년 “사람이 무섭다”

김영오씨(51)는 6개월 전부터 전남 무안에서 귀농교육을 받고 있다. 오는 10월이면 귀농학교를 졸업한다. 함께 공부하는 80명은 그가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인 것을 모른다. 몰라서 다행이고, 어쩌면 모르는 척해줘서 고맙다고 그는 생각한다.

2014년 ‘세월호특별법’(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6일 동안 단식을 해 ‘세월호 투쟁’의 상징이 된 김씨는 5년이 지난 지금 “사람이 무섭다”고 말한다. 지난 1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마지막 메시지’라는 글을 올린 뒤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땅과 풀, 나무만 보고 산다. 무안에서 농사꾼으로 정착하는 것이 소망이지만, 이 또한 너무 큰 꿈일까 두렵다. 첫째 딸을 떠나보낸 후 그는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가족이나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 않는다는 그는 아주 어렵게 이번 인터뷰에 응했다. 참사 5주기를 1주일여 앞둔 지난 8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만났다.

- 건강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근데 단식 후유증인지 피곤을 빨리 느껴요. 하루 나갔다 오면 이틀은 못 움직이고 일어나질 못해요. 단식하면 기억력 세포가 많이 죽는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기억력도 나빠졌고요. 그것 외에 큰 이상은 없어요.”

- 아침식사도 못하고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그는 새벽길을 운전해 서울로 왔다.) 식사는 잘하는 편인가요.

“원래 아침은 안 먹어요. 하루 한 끼 먹을 때도 있고 두 끼 먹을 때도 있는데 두 끼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돼요. (단식 전에는 잘 드시는 편이었나요?) 네. 그땐 12시간씩 주야간 2교대로 일했으니까요. 회사에서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먹었죠.”

김영오씨의 키는 173㎝이다. 몸무게는 57㎏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보기엔 너무 말라서 키는 더 커보였고 몸무게는 그보다 덜 나갈 듯했다.

■ 5년간 괴롭혀온 숱한 ‘말’들에게 전합니다…
저는 그냥 유민이 아빠입니다

꿍꿍이, 강성노조, 보상금, 관종, 정치, 수작, 못난 아빠,
쇼, 딴생각, 쓰레기, 전라도, 귀족 국궁, 욕심, 연예인병…

<b>언제쯤 눈물 없는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요 </b>‘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언젠가 유민이를 만날 텐데 ‘나쁜 사람’인 채로 가고 싶지 않다”며 “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마지막까지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옷 한쪽에 세월호 노란리본과 함께 5·18민주화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나비, 제주 4·3사건을 기리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아래 사진).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언제쯤 눈물 없는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요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언젠가 유민이를 만날 텐데 ‘나쁜 사람’인 채로 가고 싶지 않다”며 “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마지막까지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옷 한쪽에 세월호 노란리본과 함께 5·18민주화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나비, 제주 4·3사건을 기리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아래 사진).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김씨는 2014년 7월14일 단식을 시작했다. 7월16일이 특별법 통과를 위한 여야의 마지막 협상일이었는데 진전을 보이지 않자 국회 앞에서 열다섯 명, 광화문광장에서 김씨를 포함해 다섯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사흘만 해보자고 시작한 단식은 8월28일 마지막으로 남은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중단됐다. (그는 단식 40일째에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고 단식 46일째인 28일 단식을 중단했다.) 그때 병원에서 기록한 그의 몸무게는 46㎏. 지방과 근육이 다 빠져 갈비뼈가 장기를 찌르고 있었다.

세월호특별법 통과 위한 단식이
‘보상금 노린 수작’ 음해·조롱으로
박근혜 정부의 조작 사실 나와도
10년치 통장 보여줘도 소문은 계속
같이 촛불 들었던 사람들 오해할 땐
극단적 선택 생각할 정도로 힘들어

“보상금을 노린 수작”이라는 음해와 일베 회원들의 폭식농성 등으로 끊임없이 조롱과 공격에 시달린 김씨는 병원에서도 편하지 못했다. 김씨가 입원한 서울 동대문 동부병원에는 첫날부터 “내보내라”는 극우단체들의 항의전화가 쏟아졌다. 이후 안산 한도병원으로 옮겼으나, 그곳으로도 공격이 계속되면서 병원 업무가 마비됐다. 결국 김씨는 쫓기다시피 병원을 나왔고 단식 이후 치료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복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얼굴이 수척해 보입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신다고 들었어요.

“잘 못 자요. 잠을 자려고 소주를 습관적으로 마셨어요. 하루에 한 병 정도 마셔야 잠을 자거든요. 근데 한 시간 정도 자면 꼭 깨요. 깨고 나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어요.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유민이 꿈을 자주 꿨어요. 늘 같은 내용인데 강 건너 저편에 일곱 살쯤 된 유민이가 막 뛰어가요. 제가 이혼할 때 유민이가 그 나이였거든요. 제가 유민아~ 유민아~ 하고 부르면 유민이가 달려와서 제게 안기는 순간 꿈에서 깨요. 깨고 나면 제 품에 유민이가 없는 걸 알고 베개를 다 적시도록 울었어요. 두 달 전에 처음으로 조금 다른 꿈을 꿨어요. 유민이가 저에게 안겨서 뽀뽀를 해줬어요. 아버지(2003년 작고)도 같이 나오셨는데… 무슨 뜻일까, 왜 꿈이 바뀌었을까 자꾸 생각하게 돼요.”

- 지난 1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마지막 메시지’를 올렸습니다. (그는 ‘소문이 와전되어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소설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라는 글에서 “너무나 어이없는 소문들이 저를 쓰레기로 만들고 있다”며 “저는 지금 불행의 길에 서 있다”고 썼다.)

“김영한(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수첩을 통해 정권이 저를 사찰하고 저에 대한 음해를 조직적으로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지금까지도 ‘보상금 8억원을 받았네’ ‘양육비를 200만원밖에 안 줬네’ 그래요. 제일 큰 건 정치적으로 몰고 가는 거죠. ‘너 정치하려고 그러지’ ‘비례대표 1번 받겠네’ 이런 공격을 계속해요. 최근에는 제가 이혼하고 7~8년쯤 뒤엔가 만났던 여자 분에 대한 얘기도 합니다. 사고 이전의 제 사생활을 사고 후의 일인 것처럼 얘기하며 잘못도 아닌데 잘못인 것처럼 얘기하고 다녀요. 휴….”

- 단식 중에도 가짜뉴스가 많아서 과거 10년 치 통장내역까지 공개했죠. 5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런가요.

“정말 하늘에 맹세하는데, 보상금 바라고 단식하지 않았어요. 사고 후에 여행자보험 보상금으로 1억원이 나왔는데 단돈 10원도 안 받고 유민 엄마한테 1억원을 주고 다음날 외환은행에 가서 2000만원을 대출받았어요. 싸움이 장기화될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혼 후 전처에게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는 루머에) 양육비 보낸 내역이 있는 입출금 기록 10년 치를 뽑아서 지금도 들고 다녀요. 보여주지 않으면 안 믿으니까요. 유민이 외삼촌이 제가 유민이 똥기저귀 한 번 갈아준 적 없다고 저를 ‘못난 아빠’로 만드는 글을 올리고, 하태경(바른미래당 국회의원)이 그걸 캡처해 뿌리면서 제가 나쁜 놈이 됐죠. 전라도 놈이다… 강성노조다… 200만원짜리 국궁을 한다…. 그땐 지상파 방송 3사가 다 저를 까는(비판하는) 보도를 했어요. 지금까지도 정정보도는 안됐어요. 유민이 외삼촌한테도 사과를 못 받았어요. 경제 사정 때문에 헤어졌지만 이혼 후에도 유민 엄마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요. 부부는 아니지만 부모잖아요. 아이들을 위해 휴가도 함께 가고 했습니다. 유민이 삼우제도 같이 지냈고 팽목항에서도 내내 같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이혼한 줄도 몰랐죠. 그런데 지금은 그쪽 집이랑 원수가 됐어요.”

- 법적인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왜 안 했겠어요. 고소를 할까, 3자 대면을 할까 다 생각해봤죠. 그런데 제가 정말 견디기 힘든 게 뭔 줄 아세요. 일베나 극우보수들이 그럴 땐 참았어요. 참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같이 촛불 들었던 사람들, 세월호를 위해 싸운 사람들 중에도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이 있어요. 그게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유민이 죽고 나서 제가 겪었던 모든 일 중에 그게 가장 힘들어요. 연예인들이 댓글 때문에 자살하잖아요. 저도 절실히 느껴요. 지금도 세월호는 진상규명이 안돼서 다들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제가 고소·고발을 해봐요. 결국 극우나 일베들이 박수 치고 좋아할 거예요. 그건 보기 싫거든요. 저 혼자 조용히 삭이고 말아요. 제가 1월에 SNS에 메시지를 올리고 아무 활동도 안 하니까 이제 좀 조용해요. 제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저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증오하는 것 같아요.”

- 왜 그러는 걸까요. ‘유민 아빠’에게도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건가요.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제가 의도치 않게 세월호 사건의 아이콘처럼 되면서 이쪽저쪽에서 저를 많이 찾아왔는데 제가 (그들이) 하자는 대로 안 했어요. 폭력시위로 가야 한다는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고요. 진실과 촛불의 힘을 믿었거든요.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집행부) 선거에 나가라는 것도 안 나갔어요. 이쪽저쪽 단체들에서 행사 때마다 오라고 해도 안 갔어요. 이쪽에 가면 저쪽을 욕하고, 저쪽에 가면 이쪽을 욕하고 그러는데 제가 어떻게 가요. 그랬더니 저보고 ‘연예인병 걸렸다’ ‘관종이다’ 욕하더라고요. 세월호 가족들은 서로 분열되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어요. 국정원이 회유하고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했던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얘기하면 가족들(그는 세월호 유가족을 ‘가족’이라 불렀다)한테 피해 갈까봐 혼자 삭였어요. 저는 지금까지도 철저히 혼자예요.”

고등학교 중퇴 후 줄곧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로 살던 김씨는 2013년 성실함을 인정받아 정규직이 됐다. 김씨는 정규직이 되자마자 두 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마음 놓고 대학 준비해”라고 말했다. 공부를 좋아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하겠다고 했던 유민이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족이 비로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했을 때 재앙이 닥쳤다. 이듬해 유민이는 세상을 떠났고, 세월호 투쟁이 길어지면서 김씨는 평생소원이던 정규직 직장에 사표를 냈다.

응원해준 시민들 덕에 살아가지만
여전히 사람 속에 가는 건 두려워
언니 잃은 슬픔에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위로해준 둘째딸에 미안해
사고 원인·구조 과정 ‘의혹투성이’

- 응원하고 지지하는 시민들도 많았죠. 아들딸이 되어주겠다고 한 학생들도 있었고요.

“네… 그래서 제가 살아있는 거예요. 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저를 보면 울면서 미안하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유민이보다 두 살 어린… 지금 곤지암 쪽에 사는 딸도 생겼고요. 아들딸이 되어주겠다는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다 챙기지도 못했네요. 저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아는데… 알면서도 사람들 있는 곳에 가는 게 무서워요. 혹시 저 속에 또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진 않을까 두렵고요. 지금 가장 속상한 게 있는데요. 제가 아들이 한 명 생겼거든요. 2015년 한 식당에서 누가 ‘혹시 유민 아버님 아니세요?’ 하더니 갑자기 저를 껴안고 우는 거예요. ‘저 정성철 소방관님 아들 정비담입니다’라고 했어요. 세월호 구조하러 왔다가 헬기사고로 돌아가신 소방관이 다섯 분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이에요. 그 청년 팔뚝에 노란리본 문신이 새겨져 있더라고요. 저는 죄송해서 감히 찾아가지도 못했는데 그분들은 저희를 위해서 같이 싸워주고 있었던 거예요. 청년이 ‘아빠라고 불러도 되죠?’ 해서 같이 엉엉 울었어요. 친아들처럼 지냈는데 제가 너무 마음이 힘들고 하니까 잘 챙겨주질 못했어요. 못 본 지 1년도 넘었어요. 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너무 미안해요….”

- 유나(둘째 딸)씨와는 잘 지내나요.

“네. 그럼요. (그는 인터뷰 중 처음으로 웃었다.) 15일에 같이 유민이한테 가려고 해요. 둘이 효원(납골당)에 가서 조용히 보고 오려고요. 참사가 벌어진 게 유나가 고1 때였어요. 하루아침에 언니를 잃은 슬픔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아빠가 단식을 하고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유나가 너무나 힘들었어요. 그 많은 일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죠. 모자란 부모 밑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뿐인 언니였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하던 저를 걱정하고 위로해주며 힘이 되어준 고맙고 소중한 딸입니다. 지금은 본인의 소중한 꿈을 위해 살아가고 있어요. 제가 그랬어요.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살아만 있어. 아빠보다 먼저 죽지만 말아라.’ 유나가 저한테 그래요. ‘나는 아빠 때문에 나쁜 짓도 못해.’ ‘유민 아빠’ 딸인 거 다 알잖아.’ ”

김씨가 단식을 하며 음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유나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저희 아빠가 단식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딸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십니다. 이러다 저희 아빠 죽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라고 호소했다.

- 벌써 5년이 됐습니다. 세월호특조위(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2기가 활동 중이죠. 최근에 해군과 해경이 사고 당시 폐쇄회로(CC)TV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건 우리(유가족들)는 이미 2015년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세월호 DVR(디지털영상저장장치)은 참사 일어나고 두 달 뒤 6월22일에 건진 건데요. 제가 간담회 같은 곳에 가면 마대자루에 담긴 DVR 사진을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물어봤어요. ‘이게 바닷물 속에 있던 것처럼 보이냐’고요. 우리 유민이 휴대폰이 바다에서 7일 만에 올라왔어요. 유민이가 마지막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이 8일째 제 손에 쥐어졌어요. 바닷물에 염분이 많잖아요. 그래서 휴대폰이 쪼개진 사이에 소금이 껴서 하얗게 부식돼 있었어요. 휴대폰도 7일 만에 그렇게 되는데 그 DVR은 너무 깨끗해요. 부식된 부분도 없고요. 두 달 동안 물속에 있었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요. 제가 동부병원에 있을 때 김인성 교수(전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DVR 64개 채널을 복원해서 갖다 줬는데요. 침몰될 때, 구조될 때 상황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단 한 개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의심했어요. 누군가 바꿔치기했고 조작한 거다.”

사고 후 선원과 해경이 각각 매뉴얼대로만 움직였다면 희생자들을 구조할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가천대 초고층방재융합연구소는 당시 배가 기운 정도와 시간 등을 분석한 시뮬레이션 결과 “승선원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5분5초가 걸렸다”고 밝혔다. 보다 보수적인 조건으로 계산해도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9분28초가 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해양심판원 보고서 역시 “당시 바다가 잔잔했고 수온이 12도 정도인 데다 주변에 구조세력이 많아 사고 발생 후 일반적인 선언의 상무에 따라 여객을 적절하게 대피시켰다면 인명 손실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극소수에 그쳤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 “5·18…대구지하철…세월호만큼 억울한, 규명 안된 사건들,
참사 반복되지 않으려면 광장의 촛불이 꺼지지 않아야”

[커버스토리]‘유민 아빠’의 5년 “사람이 무섭다”

- 시간이 지나면 진상규명이 될 수 있을까요.

“100% 밝혀지진 않을 겁니다. 참사 직후부터 정부가 많은 자료를 폐기하고 삭제했어요. 많은 증거가 물속에서 이미 산산조각 났잖아요. 우선 침몰 원인이 밝혀져야 하는데… 선조위(선체조사위원회)도 내인설(내부 원인에 의한 침몰)과 외인설(외부 충격에 의한 침몰)을 3 대 3으로 발표하고 결국 결론을 못 내렸잖아요. 그나마 정권이 바뀌었으니까 참고 기다리고 있어요. 박근혜 때보다는 뭐라도 나서서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 가족들은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 초조할 거예요. 세월호 가족들은 그동안 많이 상처받았어요. 사고 이후에 언론은 보상금 얘기만 했어요. 왜 피해자들이 돈 뜯어내는 시체팔이가 돼야 하는지…. 정치적으로도 이용당했어요. 박근혜가 2014년 5월16일에 유가족들을 비공식으로 청와대로 초대했어요. 6·4 지방선거 앞두고 5월19일에 대국민담화 발표하려고 그런 거였어요.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 때문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잠재우기 위해 그랬던 거죠.”

- 그때 박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땐 유가족들도 희망을 가졌었겠죠.

“그랬으니까 울었죠. 그때는 정말 울고 불며 ‘제발 이것 좀 해 주세요’라고 매달렸어요. 박근혜가 약속했을 때 우리는 철저하게 믿었어요. 그런데 6·4 선거 끝나고 박근혜는 유가족을 단 한 번도 안 만났어요.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거예요.”

김씨는 2016년 3월부터 tbs라디오 <가슴에 담아온 작은 목소리>를 진행했다. 1주일에 한 번 15분 동안 방송된 이 프로그램을 통해 김씨는 일본군 위안부, 5·18, 형제복지원 등 여러 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났다. 이 프로그램은 2018년 3월 제30회 한국PD대상에서 작품상(시사교양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담당 PD는 시상식에서 “진행만 해도 되는데 전국 어디든 차를 끌고 달려와 주신 우리 멋진 김영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모든 인터뷰 제안을 거절했으나, 진행자가 ‘유민 아빠’라는 사실에 마음을 연 출연자들도 많았다. 김씨는 지난 2월 이 프로그램에서 자진 하차했다.

- 라디오 방송은 왜 그만뒀나요.

“저 때문에 방송국에도 피해가 가는 것 같아서요. 말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도 3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세월호보다 더 억울한 사건이 어디 있겠나 싶었는데 5·18도 그렇고 대구지하철참사, 형제복지원, 삼풍백화점 사고도 오래전에 일어난 참사인데 아직도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았어요. 어떤 분은 저를 부럽다 했어요. ‘아버님은 (딸을) 찾았잖아요’라면서요. 이런 사건들은 다 똑같아요. 진상규명은 제대로 되지 않고 국가는 그 흔적을 재빨리 지워요. 내비게이션을 찍고 성수대교를 찾아갔다가 놀랐어요. 사고에 대한 어떤 흔적도 없더라고요. 전남도청도 가보면 총격전이 일어났던 곳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해요.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도 마찬가지예요. 추모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어요. 지금 안산에 세월호 안전공원을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요. 절대 추모시설로 하지 말고 ‘안전공원’으로 하자고 했어요. 사람들이 와서 기억하고 안전을 생각하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도 시청 앞에서 공원을 ‘납골당’이라고 반대하며 시위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직접 만든 ‘생명존중 나무 리본’ 목걸이와 휴대폰 고리. 김씨는 “사포질에 손톱이 닳고 물집이 터져도 엄마 아빠를 애타게 찾아가며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유민이를 생각하며 나무 리본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직접 만든 ‘생명존중 나무 리본’ 목걸이와 휴대폰 고리. 김씨는 “사포질에 손톱이 닳고 물집이 터져도 엄마 아빠를 애타게 찾아가며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유민이를 생각하며 나무 리본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인터뷰 도중 김씨는 “보여줄 게 있다”며 일어서더니 가방에서 나무로 만든 세월호 리본 모양의 휴대폰 고리와 목걸이 펜던트 등을 꺼냈다. ‘생명존중 리본’이라고 했다.

- 직접 만든 건가요.

“네. 작년 8월에 (전남) 광주에 있는 공방에 갔다가 나무는 죽어서도 숨을 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얘길 들으니까 아이들 생각이 나더라고요. 우리 유민이도 몸은 죽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숨을 쉬는 생명을 가졌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외국에선 생명존중, 안전, 인권, 난치병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 인식(awareness)리본 캠페인이라고 해서 색깔별 리본운동을 하고 있대요. 저는 여러 리본 색깔들을 아울러 자연을 상징하는 나무로 리본을 만들어서 ‘생명존중을 잊지 말고 알리자’라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로 노란색 리본을 많이 나누고 달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어르신들 중에 노란리본을 보면 삿대질하고 심지어 와서 뜯어버리는 분들도 있어요. 노란색이 아니라 나무면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공방에서 리본 모양으로 나무를 잘라다 김씨가 직접 사포질을 해서 하나하나 완성한다고 했다. 사포질 때문에 그는 손톱이 닳고 물집이 터졌다. 처음엔 향나무와 참중나무로 만들었지만 너무 잘 부러져서, 지금은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와 수입목재인 부빙가나무를 쓰고 있다. 이렇게 만든 생명존중 리본은 5000여개다. 전국 각지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 참사 피해자들, 미제사건 피해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김씨의 SNS(@생명존중나무리본)를 통해 주문하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재료비(5000원)를 받고 만들어 보내준다. 김씨는 이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 이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저는 촛불이 꺼지지 않는 게 답이라고 봐요. 어쩌면 세월호보다 더 억울한 사건들도 있었는데, 왜 국민들은 세월호를 더 기억하고 가슴 아파하는 걸까요. 그건 참사 현장이 모든 국민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건들도 낱낱이 보여졌다면 외톨이처럼 쓸쓸하게 싸우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언론과 시민의 힘이 정말 중요해요. 처음 단식을 시작할 때 앞이 안 보였어요. 그런데 시민들의 힘으로 광화문 단식농성장이 10만 인파로 가득 찼어요. 동조단식까지 해주셨죠.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박근혜 탄핵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죽을 때까지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씨는 1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국민학교’ 5학년생 아들과 가난 때문에 떨어져 살아야 했던 기억을 일생 가장 후회한다. 이제라도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있어 행복하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정치라면 관심도 없던 어머니는 이제 정치뉴스를 열심히 본다. 아들과 함께 동조단식을 해줬던 이들의 안부를 종종 묻는다. ‘유민 아빠’도 어머니에겐 하나뿐인 아들이다. 김씨는 어머니를 보며, 다른 생명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세월호보다 훨씬 더 오래
쓸쓸히 싸우는 사람들 많아
생명존중 세상 올 때까지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

김씨는 말했다. “아직도 전국에서 피켓을 들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아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저도 이런 일을 겪기 전까지는 잘 몰랐어요. 세월호보다 훨씬 더 오래됐는데 곁에 있어주는 사람 없이 쓸쓸하게 싸우는 분들도 있어요. 어떤 분들은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만으로도 제 손을 붙잡고 우세요. 다른 뜻은 없어요. 유민이의 죽음으로 돌아본 세상은 나보다도 억울하고 소외당하며 힘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이 될 때까지… 잊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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