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하는 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순간

김소영

‘놀자’·‘놀이’와 다른 ‘놀기’

보물 지도·‘칠드런스컵’ 대회·‘지탈’·정글짐 술래잡기…

나에게는 보물 지도가 한 장 있다. 다은이가 아홉 살 때 그려준 것이다.

동네 도서관 앞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예쁜 상자를 발견하고는 특이하게 생긴 돌멩이, 길가 한구석의 꽃, 주머니에 들었던 머리 끈 같은 것을 모아 담았다고 했다. 그 상자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었다더니 문득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비밀 지킬 수 있죠? 어디 숨겼는지 알려드릴까요?”

“비밀은 지킬 수 있지. 그런데 만약에 선생님이 찾아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는지 다은이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다 결심한 듯 연필을 잡았다.

“그럼 가서 보기만 해야 해요. 신랑이랑은 같이 가도 돼요.”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요즘 아이들 게임만 한다”지만…
놀고 싶어하는 마음은 변함 없다

거창한 절차 만들어 보물 숨기고
운영되기 어려운 대회를 꾸리고
어울려 규칙을 만들고 또 고치면서
가까워졌다 실망했다 기대도 하는
성장에 꼭 필요한 대체불가한 순간

‘놀기’에는 아주 큰 소득이 있다

‘신랑’은 물론 나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이니 부부 동반까지는 허락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은이는 설명을 해가며 열심히 지도를 그렸다. 다은이와 친구들은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도서관 뒷길로, 공원의 좁은 길로, 이리저리 경로를 꼬아가며 보물 숨길 곳을 찾았다고 했다. 그렇게 완성된 보물지도는 꽤 복잡했는데 결국은 독서교실 바로 앞 쉼터 근처에 X표가 쳐졌다. 도서관에서 곧장 왔다면 2분도 안 걸렸을 지점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는 아주 긴 여정이었나 보다.

“엄마가 30분만 놀다 오라고 했는데 한 시간도 넘게 놀아서 저희 다 혼났어요.”

나는 보물 지도를 고이 받아 파일에 끼워 두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물을 찾으러 가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은이와 친구들의 특별한 오후가 담긴 이 지도가 보물이나 다름없으니까.

“요즘 아이들은 놀 시간이 없다” “친구가 없다” “게임만 한다”고 한탄하는 어른들도 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어린이들 입장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과 환경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어린이들이 놀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마련하고 친구를 불러내고 일을 만들어내면서, 어린이들은 논다.

주호는 동네 형들과 ‘칠드런스컵’ 대회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모월 모일에 개막식을 열면서 축하 공연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주경기장은 누군가네 집 앞 공터. 한 팀에 세 명씩, 모두 네 팀이 토너먼트도 하고 리그도 할 거라고 했다. 열 살인 주호가 제일 어린 선수고, 최고령 선수는 열네 살이라서 팀을 나누기가 쉽지 않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것은 회의로” 결정했다는 주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경기 앞두고 건강 관리 잘해야겠다. 배탈이라도 나면 어떡해.”

“그것도 회의 때 얘기했는데, 화장실은 보내주기로 했어요. 쿨링 브레이크 겸요.”

“ ‘컵’인데, 상품은 없어?”

“원래는 각자 1000원씩 내려고 했는데요, 도박으로 걸려서 경찰서 갈까 봐 그건 안 하기로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회를 조직하는 과정이 실제 경기보다 재미있었을 것 같다. 비록 개막식 당일에 까먹고 안 나타난 선수, 갑자기 마음을 바꿔 출전을 취소한 중학생 선수 때문에 약간의 파행을 겪긴 했지만. 그것까지도 주호네 ‘칠드런스컵’의 성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평소에 밖에서 놀기보다 가만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지연이도 ‘지탈’을 할 때만은 빠지지 않는다. 지탈은 “지옥 탈출” 아니면 “지구 탈출”의 준말이란다. 나는 처음 듣지만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꽤 오래된 놀이라고 했다.

“학교에 구름사다리랑 미끄럼틀이랑 그물이랑 합쳐진 놀이기구 같은 거 있잖아요. 거기서 술래가 다른 애들을 잡는 거예요. 술래는 땅에 내려와도 되는데 다른 애들은 땅 짚으면 죽는 거예요. 대신에 술래는 눈을 감아야 해요.”

“뭐라고? 눈을 감는다고? 그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나는 기함을 했지만 지연이는 태연했다.

“눈을 감아야 재미있죠! 그리고 안 떨어져요.”

사실 그런 아슬아슬함이 놀이의 재미겠지. 말로만 들어서는 술래가 너무 불리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단다. 술래가 아닌 아이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느라 꽤 긴장된다고 한다. 그래도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나는 걱정했지만 “에이, 괜찮아요”. 어린이들은 느긋했다.

어린이들의 놀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어린이와 관련된 행사, 축제 등에 “놀자”는 제안은 빠지지 않는 표어가 되었다. 그런 것만 보아서는 어린이가 놀 일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다. 모래야 놀자, 그림자야 놀자, 동화야 놀자, 경제야 놀자, 환경아 놀자, 우표야 놀자, 자연과 놀자, 도시에서 놀자, 서당에서 놀자… 모두 어린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그러면서도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내건 표현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이책 잔치’의 표어로 “다 같이 놀자” 같은 것이 발표되면, 어린이 대상 행사라고 너무 안일하게 기획한 것은 아닌가 의심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권아 놀자”도 그렇다. ‘어린이 인권도서 전시회’에 많은 어린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권과는 놀 방법은 없다. 인권을 놀 대상으로 여긴다 해도 곤란하다. 어린이가 진지하게 배우고 익혀야 할 지식까지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사실은 포장하는) 경우는 그 밖에도 많다. 실제 내용은 교과 학습이면서 이름에만 ‘놀이’라는 말을 붙인 프로그램들도 그중 하나다.

지난겨울, 방학을 앞둔 현우의 생활계획표를 볼 기회가 있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만날 놀러 나갈 궁리만 하고 집에 붙어 있지를 않으니 억지로라도 계획표를 만들게 하셨단다.

“그거라도 방에 붙여 놓으면 놀더라도 좀 찔리면서 놀지 않을까 했는데요, 어휴 글쎄 이건 선생님이 직접 보셔야 알아요. 기대하세요.”

전화로 먼저 귀띔을 받았는데도 현우의 생활계획표를 보니 웃음이 터졌다. 공부는 하루에 두 시간이나 할까 싶은데 ‘게임, 야구, 놀기, 텔레비전 보기, 휴식, 잠’ 등은 섬세하고도 단호하게 구분되어 일과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정말 지킬 수 있게 짜라’는 어머니 말씀을 따랐다고 현우는 설명했다.

나는 현우의 생활계획표에서 “놀기”가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어른들의 ‘놀자’나 ‘놀이’와 달리 현우가 쓴 “놀기”에서는 반드시 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디서 놀지, 무엇을 하고 놀지, 누구랑 놀지는 몰라도 날마다 놀기는 놀겠다는 의지. 그러고 보면 놀기의 핵심은 이런 ‘예측 불허’에 있지 않을까? ‘놀자’ 프로그램이며 온갖 ‘놀이’가 제공하는 적당한 환경과 도구, 규칙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이다. 경험의 폭을 넓히고 지식을 얻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놀기”는 예측할 수 없을 때 확실히 더 재미있다. 소득이 없어도 된다. 그점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거창한 절차를 만들어 보물을 숨기고, 제대로 운영되기 어려운 대회를 꾸리고, 몇 번이고 지옥을 탈출했다 다시 들어갔다 하는데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아니, 정말 소득이 없을까? 그때그때 필요한 규칙을 만들고 고치고 응용하면서 배우는 것이 없을까?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억울한 처지가 되어보고, 박수도 받아보고, 믿기지 않는 승리나 아까운 패배를 경험하는 것은 어떤가.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던 아이와 한편이 되어보고, 힘을 합치고, 의외로 손발이 맞아 가까워졌다가 다시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는 것도 소득이 아닐까? 복잡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집에 갔다가 다음날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어린이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나간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어린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놀기에는 아주 큰 소득이 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결코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나는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어떤 세상이 펼쳐지든 되도록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가지는 꼭 지켜내고 싶어진다.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진짜로 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바깥이 위험해도 어린이를 나가 놀게 하자는 게 아니라, 어린이가 놀 수 있는 환경만은 어떻게든 만들자는 뜻이다. 지난봄부터 어린이들은 어린이집에도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당연히 마음껏 놀지도 못했다.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협조한 집단이다. 물론 어린이는 실내에서도 어떻게든 놀 거리를 찾아낸다. 그렇지만 어디든 나가서 잠깐이라도 뛰놀고 와야 칩거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게 어린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어린이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어른들도 알아야 한다.

한산해진 동네 놀이터를 지나다가 하준이 생각이 났다. 원래는 놀이터에 어린이들이 있다 싶을 때 다가가 보면 언제나 하준이가 있었다.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 인사할 때 보면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이마에 딱 달라붙곤 한다. 몸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날 지경이다. 때로는 공을 차느라 급해서 멀리서 내게 손만 흔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땐 마주 손을 흔드는 나까지도 싱싱해지는 것 같다. 한번은 수업 때 ‘내가 좋아하는 놀이 설명하기’를 했다. 하준이는 ‘정글짐 술래잡기’ 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떨어져도 술래, 잡혀도 술래예요.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더 많으면 정신 없고, 더 적으면 심심해요.”

나는 또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 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 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바로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 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필자 소개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하는 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순간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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