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존중’,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마라

조운찬 논설위원

5년 전 부모의 산소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농사일로만 평생을 보낸 분들이라 빗돌에 쓸 이력이나 연보랄 것은 없었다. 그래도 유훈처럼 남긴 몇 마디는 생생했다. 짧은 비문에 ‘무용지물이 되지 말라’는 글귀를 새기고 보니 생전의 부모 모습이 겹쳐지면서 ‘일(노동)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읽혔다. 당신들은 ‘노동의 화신’이었다. 농기계에 손가락이 으깨지고 지문이 닳아 없어졌지만, 일만큼은 놓지 않았던 분들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그 노동의 고단함은 모른 채 오히려 일하는 당신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돌이켜보면 ‘무용지물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친 채찍질이었는지 모른다.

조운찬 논설위원

조운찬 논설위원

애초부터 ‘노동’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일하는 부모 덕분일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3대 정신의 맨 앞에 ‘근면’을 내세울 때도 당연하게 여겼다. 노동자를 근로자로 부르면서 가난을 구제하는 길은 근면밖에 없다고 끊임없이 세뇌받던 시절이었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그것이 부모 세대의 실화인 양 모두 개미처럼 일해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곤 했다.

이솝보다 100년가량 앞서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이라는 서구에서 가장 오래된 노동 예찬시를 남겼다. 헤시오도스는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형의 재산까지 가로채려는 동생 페르세스에게 일터로 나가라며 노동의 신성함을 설파한다. “너의 창고가 가득 차도록 일을 해라. 노동은 수치가 아니다. 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노동은 축복이 될 것이다. 가난에는 치욕이 따르지만 부에는 자부심이 뒤따른다.” 노동은 과연 축복이 될 수 있을까.

일하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노동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노동’의 이미지는 무겁고 어둡다. 한자어 ‘노동(勞動)’은 사지를 써서 하는 고된 일을 의미한다. 노동자를 뜻하는 ‘노인(勞人)’에는 근심으로 괴로워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노동’의 독일어 ‘아르바이트(Arbeit)’의 원래 뜻은 고통이고 불어의 ‘트라바유(travail)’는 고문 도구를 가리키는 라틴어 ‘트리팔리움(tripalium)’에서 왔다고 한다. <성경>은 노동을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이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형벌로 묘사하고 있다.

불가에 ‘일하지 않는 날은 먹지도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세속에는 일하지 않고 먹는 이들이 있다. 이들 유식계층이 노동을 칭송하고 권장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직업적 위계가 뚜렷했던 전통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시대 일기·편지와 같은 선비들의 문헌은 넘쳐나지만, 그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간혹 노동시가 보이지만 농민이나 유랑민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사회시가 아니라면 소작농이나 머슴을 일터로 내모는 권농시일 뿐이다. ‘일정한 노동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맹자)거나 ‘사대부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업에 종사해야 마음이 사악해지지 않는다’(순자)는 말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지며, 근로의 의무를 진다’(제32조 1, 2항)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 속 선현의 말처럼 헌법 조문 역시 현실을 견인하지 못한다. ‘부지런한 노동(근로)’을 강요받는 현실에서 노동은 자유나 권리가 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은 고통이고 고문이며 형벌이다. 특히 출근한 노동자가 매일 산재로 7명씩 죽어가는 이 땅에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노동이다.

논란은 있지만 ‘노동 존중’을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지난 4년간 기울인 노동정책은 평가할 만하다. 고용과 임금 분야의 성과가 눈에 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가속도가 붙었고 노조가입률은 의미 있는 향상을 보였다. 주 52시간제 적용 기업도 많아졌고 최저임금도 미흡하지만 꾸준히 인상됐다. 유독 노동자 생명을 지키는 산업 안전망은 제자리걸음이다. 2년 전 김용균씨의 충격적인 사망 이후에도 죽음의 행렬은 멈출 줄 모른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속에서 ‘노동 존중’만 외쳐대는 기묘한 시대를 살고 있다. 기업의 눈치를 보며 입법을 미적대던 여야 정치권이 산재를 줄이기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모레(8일)까지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미덥지 않지만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번에도 실효성 있는 법을 내놓지 못하면, 더 이상 ‘노동 존중’을 꺼내지 말라. ‘노예노동 존중’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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