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는 20세기 미술사의 미스터리…신비화·신격화 걷어내려 했다”

김종목 기자

인터뷰를 섭외하려 전화를 걸었을 때 최열은 김복진(1901~1940) 묘소로 가던 중이었다. 김복진 기일인 매년 8월18일 몇몇 미술인들이 충북 청주시 팔봉산 자락 묘소로 가 참배한다. 8월 김복진상 시상식도 연다.

김복진은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이자 조소 예술의 개척자, 최초의 미술비평가이자 예술운동가로 평가받는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을 이끌었다.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5년간 옥고를 치렀다. 딸이 출생 1년만에 죽고, 이듬해 갑작스레 병사했다.

김복진 무덤을 찾아 묘비를 세운 1995년 최열은 <김복진 : 힘의 미학>(재원)도 펴냈다. 김복진에 대한 첫 평론이자, 최열의 첫 평전이다. 15년 뒤인 올해 8월15일 그는 다섯 번째 평전 <추사 김정희 평전>(돌베개)을 출간했다. 김정희와 김복진은 각각 복고주의자, 공산주의자였다. 다른 시대, 다른 이념의 간극에 수형과 비극적 삶, 예술혼이란 공통 요소가 두 사람에 걸쳐 있다.

<추사 김정희 평전>을 낸 미술평론가 최열이 지난 20일 김정희 본가 주소지인 서울 통의동의 백송터에서 촬영에 응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추사 김정희 평전>을 낸 미술평론가 최열이 지난 20일 김정희 본가 주소지인 서울 통의동의 백송터에서 촬영에 응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최열은 김복진·권진규·이중섭·박수근·김정희 등 고독과 고통으로 신산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의 평전을 써왔다. 평전 쓰기의 제1기준은 사실이다. 김복진 평전을 쓸 때도 김정희 평전을 쓸 때도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인터뷰 때 책 출간 뒤 확인한 오류를 기자에게 알렸다. ‘숙종이 세자였던 영조에게’에서 세자를 ‘왕자’로 바로잡았다. ‘소봉래’ 탁본과 ‘천축고선생댁’ 사진 설명에 공통으로 들어간 ‘송석원 글씨 끝에 새긴 서명’을 각각 ‘예산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긴 글씨’, ‘예산 화암사 쉰질 바위에 새긴 글씨’로 수정했다. 김정희가 자기만의 세계를 이룬 시기를 서술할 때 적은 “1810년부터 1839년에 이르는 20년의 세월”이란 구절에서 ‘20년의 세월’을 ‘30년의 세월’로 고쳤다. ‘김정희 생가 주변 통의동 백송’에서 ‘생가’를 ‘본가’로 변경했다. 2쇄를 찍기 전 인터뷰를 통해 독자에게 출판 이후 확인한 오류를 알리고 싶어했다. 그는 책 머리말에 “어떤 것도 완성이란 없고 끝은 더욱 없는 법이다. 오류가 있어 미완성이고 왜곡이 있어 쟁론 대상이다. 오류와 왜곡까지 포함해 나의 <추사 김정희 평전>은 나의 것일 뿐,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고 썼다.

지난 20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부근에서 만나 인터뷰를 시작했다. 추사가 어린 시절 양자로 들어간 큰아버지 본가 통의동의 백송터로 가 인터뷰를 이어갔다. 다음은 일문일답.

허련이 그린 ‘완당(김정희의 또 다른 호) 선생 초상’. 최열은 “그윽이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워 인간 김정희의 풍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걸작”이라고 했다. 손세기·손창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허련이 그린 ‘완당(김정희의 또 다른 호) 선생 초상’. 최열은 “그윽이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워 인간 김정희의 풍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걸작”이라고 했다. 손세기·손창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094쪽의 대작이다. 미주만 90쪽인데.

“탄생부터 죽음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김정희에 관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있다. 김정희도 자신에 관해 많은 말을 남겼다. 연구자들의 담론도 많다. 김정희란 인물과 그 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진 않았다. 탐구할수록 질문이 쌓였다. 그 답변을 스스로 구하려 했다. 추사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출판사도 참고문헌이 많고, 미주도 많아 놀라더라(웃음). 읽기 쉽게, 해석을 많이 넣어 쓰면 ‘사실’이라는 반석을 세울 수 없다.”

- 사실이라는 반석은 무엇인가.

“내 평전의 목적은 멋진 해석, 그럴듯한 주장이 아니다. ‘사실의 기록’이다. 김정희가 학문을 예술로 변용하는 재능에서 천재였던 건 틀림없다. 그런데 후대에 이런 평가를 넘어 김정희가 신화이자 신앙이 되었다. 예산엔 추사기념관, 제주엔 제주추사관, 과천엔 추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김정희를 예찬한 담론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김정희라는 존재와 그에 관한 사실은 하나인데, 연구자와 추사 애호가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추사 김정희’가 나와버렸다. 월인천강(月印千江, 하나의 달이 모든 강물에 비침)처럼 해석이 다양하다. 김정희에 관한 인식이 풍요로워지면서 과장도 많아졌다. 신비화, 신격화가 싫었다. 이 평전에서 그걸 다 걷어내려 했다. 미술사학의 방법론에서 ‘사실이 먼저인가, 해석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미술사 입문자를 위한 대화>(혜화1117)란 책에서 이 문제를 한 장에 걸쳐 다뤘다. 나는 압도적으로 사실이 중요하다고 본다. 해석은 사실 다음이다. 어릴 때는 멋진 해석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자료를 읽다 미심쩍은 부분이 나오면 다시 ‘사실이 뭐지’ 하고 되돌아갔다. 머리말에 썼듯이 술이부작(述而不作)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론으로, 사실에 의거해 사실을 드러내려 전심을 다했다. 서술의 근거로 삼은 건 김정희의 말과 행동이다. 그 언행이 곧 수평선의 표면이다. 그와 마주친 이들이 남긴 기록도 좇았다. 부제를 어떻게 정할지 고민하다가 ‘예술과 학문을 넘나든 천재’로 정했다. 나만의 무엇이 없는, 평범한 이 부제는 그 표면 위의 언행을 황금잣대로 삼으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드러난 것만 쓰자고 작정했다. 절제하고 절제했다. 나의 개입은 최소화했다. 책은 그래서 ‘추사 김정희 인식사’이자 ‘추사 김정희 연구사’다. 사실 위주로 쓰다 보니 그 수평선 표면 아래가 보이기도 했지만 참았다.”

최열은 이 책에서 사실과 의견을 구분했다. 예를 들어 김정희의 중화주의 세계관을 두고 의견·해석을 넣어 직접 비판한 게 아니라 자신의 <한국근대사회미술론>(1981)에 쓴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책 띠지에도 사실을 반영하려 했다. ‘김정희에 관한 모든 것’이 아니라 부사를 넣어 ‘김정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고 썼다.

김정희는 1816년 7월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조사한 때부터 1819년 4월 문과에 급제한 때 사이에 ‘선면산수도 : 황한소경’을 그렸다. 30대 초반 때 작품이다. 최열은 “부채의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 구도가 빼어나다”고 했다.

김정희는 1816년 7월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조사한 때부터 1819년 4월 문과에 급제한 때 사이에 ‘선면산수도 : 황한소경’을 그렸다. 30대 초반 때 작품이다. 최열은 “부채의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 구도가 빼어나다”고 했다.

- 평전 대상에게 애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고 꼭 100년이 지난 1956년에 태어났다. 그 천재가 100년 뒤 환생했는데, 둔재라도 나라면 좋겠다는 공상도 했다. 김정희 평전을 쓸 때 자꾸 그 사람만 들여다보니까 내가 김정희가 된 것 같다고도 느꼈다.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 것도 맞다. 김정희는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지가 곧 감옥이다. 나도 1년 6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동지 의식 같은 것도 생긴 듯하다. 물론 대상에 대한 애정과 동지 의식 같은 건 배제했다. 요즘으로는 기자이고, 조선시대로 치면 사관의 자세로 임하려 했다. 내가 취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다 해서도 안 되고, 다 할 수도 없다. 이 평전 다음에 김정희를 연구하는 이들이 할 일이다.”

최열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광주 계림동 헌책방 거리에서 우연히 잡지 ‘아세아’를 집어들었다. 동주 이용희가 이 잡지에 ‘우리나라의 옛 그림’을 연재했다. ‘완당바람’을 읽고는 김정희에 관한 관심을 키웠다.

최열이 <추사 김정희 평전> 중 ‘사야(史野)’ 등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사야’는 <논어> ‘옹야장’ 편의 문장을 함축한 것이다. 최열은 ‘계산무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작이라고 했다. 김종목 기자

최열이 <추사 김정희 평전> 중 ‘사야(史野)’ 등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사야’는 <논어> ‘옹야장’ 편의 문장을 함축한 것이다. 최열은 ‘계산무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작이라고 했다. 김종목 기자

- 김정희 평전은 언제부터 썼나.

“쉰다섯 살 때인 2010년이다. 꼭 10년 걸린 셈이다.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를 떠나던 해 나이가 쉰다섯이다. 거기 착안해 2010년 집필에 들어갔다. 중간에 김정희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도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편집위원을 오래했다. 나를 불러준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추사 김정희를 써 보라고 했다. 늘 쓰려고 했지만 세월을 기다렸다. 지면 한계로 짧게 쓰려고 했는데 공부하고 쓸 게 많아져 원고가 한없이 늘어났다. 2015~2016년 ‘19세기 예원의 천재 김정희’란 제목으로 네 번 썼다. 계간지니 1년 동안 쓴 것이다. 잡지엔 줄이고 줄여서 냈는데 줄이느라 고생 좀 했다.”

- 도중 여러 책을 내긴 했는데, 저술과 강사 활동으로 밥벌이가 되나.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한다는 환상은 젊은 날에 이미 깼다. <추사 김정희 평전>을 초판 2000부 찍었는데, 다 팔리면 인세로 1100만원인가 받는다. 세금 빼면 1000만원이다. 10년을 준비하고, 5년을 혼신을 다 한 작업의 대가다. 웬만한 직장인 한달 또는 두 달 월급이다. 미술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의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을 추천했는데, 그 뒤로 한 2000권 더 팔렸다. 나이 오십에 직장 관 둘 때 주변에서 ‘글 쓰면서 어떻게 먹고 사냐’며 만류했다. ‘버틸 수 있습니다’ 하고 관뒀다. 그렇게 살았다. 요즘 말로 열정페이인데, 그 열정이라도 없었으면 못 살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여전히 소명의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선시대 사람이 아닌가(웃음).”

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선 난초 그림보다 글씨가 더 뚜렷하다. 최열은 짙어야 할 것을 옅게 하고, 가벼워야 할 것을 무겁게 한 ‘반전의 묘법’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했다. 손창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선 난초 그림보다 글씨가 더 뚜렷하다. 최열은 짙어야 할 것을 옅게 하고, 가벼워야 할 것을 무겁게 한 ‘반전의 묘법’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했다. 손창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선시대 지식인 중 김정희처럼 인기가 많은 인물은 없는 듯하다. 코로나19 와중에도 ‘세한도’ 하나 보려 사람들이 국립중앙박물관(‘세한 평안’ 전)에 몰려가고 했다. 김정희의 무엇이 지금껏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 같나.

“나는 김정희 열광의 현상을 두고 ‘20세기 미술사의 미스터리’라고 표현한다. 근대는 기술혁명의 시대, 과학기술의 시대다. 지금도 한국의 잘 나가는 모든 작가들의 기술이 최고다. 설치 미술이든 미디어 아트든 회화든 조각이든 기술력 하나만큼은 기본으로 갖췄다. 그런데 추사의 그림은 엉성하다. 추사는 그림을 잘 못 그렸다. ‘세한도’도 그렇지만 김정희의 난초 그림 중 ‘세한도’격인 ‘불이선란도’도 못 그렸다. 먹으로 쓴 글씨가 이 그림 주인 같고, 난초는 오히려 부록 같다. 글씨가 그림을 압도한다. 게다가 난초는 병들었는지 시들어 죽으려고 한다. 글씨도 모범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서구 근대미술의 기교를 기준으로 보면, 못 그린 거고, 엉터리인 거지. 이따위 그림이 무어라고 사람들이 열광할까. 그런데 이 못 그린 그림이 사람들 가슴을 치며 파고든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도 해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20세기 미술사의 미스터리다. 한국 회화사에서 누구도 김정희를 빼고 회화사를 말할 수 없게 된 것도 미스터리다. ‘모나리자’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사람 눈썹도 없고 이상한 그림이다. 근데 내가 즐거운 상태로 가서 보면 막 웃는다. 슬픈 상태에서 보면 모나리자는 슬픈 사람일 뿐이다. 마크 로스코 작품도 그렇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단조로운 색 판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로스코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추억을 되새긴다. 월인천강은 또 다른 의미로 김정희의 ‘세한도’나 로스코의 그림에 적용할 수 있다. 보는 사람들에게 천 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김정희의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단연은 중국의 유명 벼루인 단계연, 죽로는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시옥은 시를 짓는 작은 집을 뜻한다. 1849년 10년간의 제주 유배를 끝내고 서울 마포로 온 뒤 썼다. 제주 귀향살이 때 본격화한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영남대박물관 소장.

김정희의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단연은 중국의 유명 벼루인 단계연, 죽로는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시옥은 시를 짓는 작은 집을 뜻한다. 1849년 10년간의 제주 유배를 끝내고 서울 마포로 온 뒤 썼다. 제주 귀향살이 때 본격화한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영남대박물관 소장.

- 김정희는 제주 유배 시절 이양선을 보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쟁과 유배, 북경행과 이양선 경험 등 여러 조선시대 문인과는 다른 경험을 한 듯하다.

“김정희는 새로운 시대 물결이 밀려오는데, 그걸 거부하고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김정희의 글씨가 지닌 미술사적 의미는 고전적 이상으로 복귀하려는 자신의 꿈을 양식화했다는 것이다. 이상 규범으로 삼은 고대 중국 한나라로 눈을 돌렸다. 항상 거꾸로 배를 탄 것이다. 그런데 추사의 생을 떠올리면 ‘오래된 미래’ 같다. 새로운 근대로 가는 시절 오히려 옛것으로 향했다. 서구 리얼리즘 이론으로 보면, 이 사람은 복고주의자다. 그런데 봉건적 왕조 사상을 지닌 이 사람이 만들어내는 건 거꾸로 근대다. 그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현대세계를 수놓는 예술의 비조가 됐다. 옛것을 지향한 게 오히려 미래로 나아갔다. 물구나무로 바라본 세상이 훨씬 더 미래 같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절절하게 감동을 주지 않나.”

‘난맹첩’은 김정희가 자신의 환갑을 맞이해 한양의 장황사 유명훈에게 그려 보내 난초화집이다. 최열은 ‘난맹첩’ 하권 5쪽에 나온 그림이 열다섯 폭 중 최고의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하단 오른쪽에 쓴 일곱 글자 ‘此國香也 君子也(차국향야 군자야·이는 나라의 향기라 군자라네)와 중단 왼쪽의 붉은 인장이 두 줄기 난에 조응하며 공간 긴장도를 고조시킨다고 했다.

‘난맹첩’은 김정희가 자신의 환갑을 맞이해 한양의 장황사 유명훈에게 그려 보내 난초화집이다. 최열은 ‘난맹첩’ 하권 5쪽에 나온 그림이 열다섯 폭 중 최고의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하단 오른쪽에 쓴 일곱 글자 ‘此國香也 君子也(차국향야 군자야·이는 나라의 향기라 군자라네)와 중단 왼쪽의 붉은 인장이 두 줄기 난에 조응하며 공간 긴장도를 고조시킨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 평전>은 새로운 내용도 여럿 담았다. 그중 하나가 김정희의 출생지다. 추사학의 선구자인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산 월궁이라고 적시했다. 최열은 김정희의 외할아버지인 유준주(1746~1793) 동생 유만주(1755~1788)의 일기 <흠영>의 “준주 형의 집에 가 보았다. 형의 딸이 낳은 갓난아기를 보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출생지가 유준주의 집이 있던 낙동 즉 지금의 회현동 서울중앙우체국 주변이라고 정리했다. 이 기록은 2015년 김하라가 편역한 <일기를 쓰다1 : 흠영선집>에 나온다. ‘김정희와 마주친 이들의 기록’에 관한 연구가 근거가 된 것이다.

- 김정희의 출생지인 낙동에 관한 서술에다, 월성위궁을 나와 자리 잡은 용산(龍山)이 연꽃 용자를 쓴 용산(蓉山)으로도 불렀고, 그다음 이사 간 금호(琴湖)가 지금 흑석동이라는 사실 등 김정희와 관련된 지역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풀었는데.

“예술가를 탐구할 때 인문지리학을 지향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살아가는 땅과 그 땅에서 자라나 성장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 지도책을 좋아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이중환의 <택리지>도 즐겨 읽었다. <택리지>는 산천과 인간을 하나로 묘사한다. ‘궁극의 인문지리학’이자 사람에 관한 책이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은 그냥 지리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길(道)이기도 했다.”

- 이동주의 ‘완당바람’ 이후 최완수의 <김추사연구초>, 허영환의 <영원한 묵향>, 유홍준의 <완당평전>이 나왔는데.

“작업할 때 이분들이 쌓아 올린 업적을 늘 곁에 뒀다. 내 이전의 모든 것이 스승이다. 그러나 사사무은(事師無隱ㆍ스승을 섬기는데 의문을 숨길 수 없다)이다. 어찌 의문이 없겠나. ‘의문을 품고 스스로 얻는다’는 치의자득(致疑自得)을 황금 기준으로 삼았다. 후배들에게도 ‘선행 연구가 없었으면 쓸 수 있겠느냐. 항상 선행 연구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라’는 조언을 한다. 나도 그런 태도를 취한다. 앞서 작업한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 토대에서 다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김정희 예서 ‘계산무진’. 김정희는 산을 위쪽에 올리고, 아래쪽은 텅 비웠다. 최열은 추사체 가운데 변화무쌍함을 가장 강력하게 구사하고, 모순의 통일이라는 미학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김정희 예서 ‘계산무진’. 김정희는 산을 위쪽에 올리고, 아래쪽은 텅 비웠다. 최열은 추사체 가운데 변화무쌍함을 가장 강력하게 구사하고, 모순의 통일이라는 미학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 김정희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김정희 작품을 싹 끌어모아서 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봐왔던 것 중에 항상 꽂혀 있던 작품들을 선택했다. ‘계산무진’, ‘사야’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추사체의 만개를 증명하는 작품들이다. 추사체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 경판전인 ‘판전’은 처음 눈에 안 들어오다 나중 좋아하게 됐다.”

- 김복진, 권진규, 박수근, 이중섭, 김정희 등 평전을 다섯 권 썼다. 이들 모두 모두 비극적 삶을 산 것 같다.

“고등학교 다닐 때 엉뚱한 짓들을 많이 했다. 낙제해 4년을 다녔다. 항상 문제아였다. 스승이라 부를 만한 선생도 없었다. 그 스승을 과거의 자료에서 찾았던 거 같다. 근대 미술을 공부하느라 일제 강점기 때 신문을 펼치면 김복진이가 나왔다. ‘유작 없는, 조각 없는 조각가’라는 게 신기했다. 조각 기법으로는 로댕의 후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했다. 이런 사람에 관한 공부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김복진 선생을 공부하면서, 묘지도 찾아 나섰다. 1995년 서거 55주기 기념 행사를 조직하고, 묘소에 비석도 세워드렸다. 지금까지 매년 기일에 참배하러 갔다. 그런 분을 모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을 받은 거로 생각한다. 한국 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분이다. 김복진 전집도 만들어드렸다. 김복진 상도 만들어 매년 상을 주고 있다. 지금 한국에 후손이 없다. 조카가 소프라노 김복희씨인데, 김복진 선생 동생이자 카프 동료였던 김기진의 딸인데, 나이 든 뒤로 미국으로 갔다. 그 뒤로 가족 없는 묘가 된 셈이다.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분을 모시는 셈이다. 부인 허하백과 그의 아들마저도 좌익 활동 경력 때문에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다. 다른 인물도 그때마다 계기가 있다. 권진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주간경향>이나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를 자주 사봤다. 어느 매체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권진규 자살에 관한 특집 기사를 봤다. ‘예술가의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고통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구나’를 느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돈 되는 기념 조형물 작업을 수주하지 못했다. 서울대 공대에서 교양 과목으로 미술 강의를 했다. 모델 구할 돈이 없어 테라코타 3개를 구워 그중 하나를 모델료로 줬다. 평전 인물들은 애틋함, 외경, 공감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낀 분들이다. 지금 보니 비극적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묘하게 나를 끌어들인 거 같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다 평전들을 써온 셈이다.”

최열은 김복진, 권진규, 박수근, 이중섭, 김정희 등 평전을 다섯 권 썼다. 최열은 “비극적 삶을 산 이들이 나를 묘하게 끌어들였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다 평전들을 써왔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최열은 김복진, 권진규, 박수근, 이중섭, 김정희 등 평전을 다섯 권 썼다. 최열은 “비극적 삶을 산 이들이 나를 묘하게 끌어들였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다 평전들을 써왔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 평전 쓰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젊은 시절 근대미술을 공부할 때는 총론적이고 개괄적인 글들을 썼다. 어떤 주제를 잡고, 그 연구를 했다. 쉰을 넘어서면서 개개인의 예술가, 개개인의 삶이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깨달았다. ‘사람을 더 공부해야 하겠구나’ 여겼다. 사람 공부가 특정한 주제 공부보다 훨씬 힘들었다. 이를테면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같은 건 그거 하나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한 개인은 한 생애를 살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단체에 소속되고, 사건에 휘말리며 시대를 살아간다. 장엄한 대하드라마이자, 파노라마다. 그래서 더 드라마틱하다. 더 사람을 들뜨게, 설레게 만든다. 생애를 죽 따라가면, 영화나 소설을 볼 때 같은 감동을 느낀다. 그 시대를 함께 볼 수 있다. 어떤 특정 주제 연구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 추사 김정희의 삶 중에 ‘세한도’의 배경이 된 제주 유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4월엔 <옛 그림으로 본 제주>(혜화1117)를, 2012년엔 <옛 그림 따라 걷는 제주길>(서해문집)도 냈다.

“<옛 그림 따라 걷는 제주길>은 점자책으로도 냈다. 제주도문화정보점자도서관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들었는데 저작권이나 인세 없이 도서관에 기증했다. 뜻깊은 책이다. 1960년대인가, 그때 ‘금귤’이란 걸 처음 먹었다. 이런 과일이 있구나 했다. 금귤 때문에 제주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웃음).”

“김정희는 20세기 미술사의 미스터리…신비화·신격화 걷어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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