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의 한뼘 양생] 필사하는 새벽

6시, 눈을 뜬다. 아직 어둡다. 천천히 일어나 거실로 나가 물을 끓인다. 뜨거운 물 100㎖를 컵에 따르고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같은 양을 그 위에 붓는다. 창문을 열고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잠시 물이 섞이길 기다린다. 겨울 기운은 완연히 가셨다. 그래도 공기는 선뜻하다. 천천히 <동의보감>에서 말한 그 음양탕을 마시고 방에 들어와 책을 편다. 오랫동안 읽고 쓰는 일을 해왔고 이제 텍스트의 맥락을 파악하고 핵심을 요약하는 일은 숙련공에 가까워졌지만 읽기의 아름다움과 설렘을 느꼈던 적은 언제인지. 나의 읽기는 여전히 도장 깨기의 여정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얼마 전부터 다른 읽기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조금씩 천천히 읽고 좋은 구절을 또박또박 베껴 쓴다. 요즘 읽는 책은 아메리칸 원주민 출신의 식물학자 로빈 월 키머러가 쓴 <향모를 땋으며>이다. 오늘은 ‘감사에 대한 맹세’라는 부분을 읽는다. 지금도 원주민 학교에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 대신 감사 연설로 한 주를 시작한다. 감사는 모든 것의 근원인 땅에서 시작해서 물로, 물의 변형인 폭포와 비, 안개와 개울, 강과 바다로 나아간 후 물고기, 딸기, 콩과 옥수수, 단풍나무, 새를 언급하고 다시 바람과 우레, 천둥, 해와 달, 별에 이른다. 그들에게 충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경도 없고 사고팔 수도 없는 바람과 물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물이며 그것은 호혜적 관계를 통해 순환한다는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오래된 지혜였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 오논다가족을 절멸시키라고 명령한다. 일명 초토화작전! 수만명이 살해당하고 자녀들은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옷도 언어도 의례도 금지되었다. 세상과의 호혜적인 관계 방식을 빼앗기자 식물들이 사라지고 호수는 오염되고 세계가 찢겼다. 그 갈라진 틈으로 이제 윈디고가 출현한다. 윈디고는 아메리카 인디언 전설 속의 괴물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굶주림에 시달리는 녀석. 세상은 공포와 탐욕으로 뒤덮인다.

토박이 지혜·과학과 식물의 가르침

그러나 이 책은 고발에 관한 책이 아니라 복원에 관한 책이다. 모욕당하고 추방당했던 할아버지의 손녀이자 모든 것을 빼앗긴 포타와토미족의 후예인 저자는, 그래도 땅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고향이든 보호구역이든 땅은 여전히 그들의 약, 도서관, 먹여 살리는 원천이었다. 그리고 발치에 지천으로 뿌려져 있는 산딸기는, 선물과 상품은 다르다는 것, 공짜인 선물은 혼자 몽땅 쓸어 담지 않아야 한다는 자제심을 가르쳤다. 그렇게 이끌린 식물들. 그러나 지도교수는 인간과 식물의 포옹 따위는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식물은 ‘스승’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고 ‘그것’이다. 그렇게 대상으로 만들고, 대상을 부분으로 나누고, 그 부분을 요소로 환원시키는 것이 그녀가 대학에서 배운 과학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숲에서 자라고 땅에 대한 책임을 배운 그녀에게 과학은 종 경계를 건너는 방법, 다른 존재들을 최대한 온전히 아는 방법일 따름이었다.

나 역시 원주민의 후예다. 나의 먼 조상들도 어디에선가 이주해왔지만 자기가 도착한 그 장소를 “자녀들의 미래가 여기 달린 것처럼” 돌보고 가꿨을 것이다.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기고 음식을 먹기 전에 고수레를 했을 것이며, 욕심이 동티를 불러온다는 것을 단단히 새기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빨리 잊어버렸을까?

저자에 따르면 의례란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그녀의 조상들은 창조신화에 나오는 첫 식물, 향모를 기르고 땋으면서 세상에 대한 감사의례를 드렸다. 저자는 토박이 지혜와 과학을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상처 나고 망가진 세상조차 여전히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다면 우리는 절망 대신 기쁨을, 종말론적 저질 수다 대신 세상의 복원에 대한 책임을 선택할 수 있다.

상처난 세상의 복원과 치유 모색

오늘 아침,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숲은 불타고 북극곰은 죽어가고 꿀벌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모욕당한다. 나는 상심하나 무력하다. 그래도 다시 천천히 읽고 또박또박 쓴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혁명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비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이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맺힌다. 이제 나의 읽기와 쓰기는 기도, 명상, 의례가 된다. 어쩌면 아직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힘을 내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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