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왜 ‘수포자’가 많을까···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변별력’ 집착

김태훈 기자

[이상한 나라의 수포자]①

모든 과목에서 최상위 학업성취도

그러나 학년 올라갈 수록 수포자 증가

한 초등학생이 수학 공부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표현하는 게시판에 자신의 그림을 붙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초등학생이 수학 공부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표현하는 게시판에 자신의 그림을 붙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제수학연맹(IMU)은 지난 2월 한국의 국가 수학 등급을 최상위 등급인 ‘5그룹’으로 승격시켰다. 한국은 1981년 ‘1그룹’으로 가입한 뒤 41년만에 최고 등급에 올랐다. 5그룹 국가는 현재 12개국뿐이다. 지난달에는 한국 출신인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지금, 한국의 수학교육계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가 수학에 중점을 둔 방식으로 평가틀을 교체하는 등 국제적인 변화도 진행 중이다.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가 차질없이 제때에 출범했으면 다음달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의결·고시하는 등 수학을 포함한 교육정책의 큰 그림을 그려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교위는 현재 언제 출범할 수 있을지 조차 예상하기 어렵다. 수포자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적 변화에도 대응할 방안이 제 때 나오기 어려워졌다.

지난 5~6월, 3년마다 시행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가 진행됐다. 원래는 지난해 열렸어야 했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한해 미뤄졌다. 올해 평가 결과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2018년 평가까지 한국은 줄곧 수학을 비롯, 모든 과목에서 최상위 집단에 들어가는 학업성취도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런 성취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의 수포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국회 강득구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2021학년도 전국 수포자 실태 조사’를 보면 ‘자신을 수포자로 생각한다’는 비율이 초등학교 6학년에서는 11.6%에 그쳤지만 중학교 3학년 22.6%, 고등학교 2학년 32.3%로 급증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수학적 사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은 되려 늘고 있다. 한국 수학교육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100명 중 2명만 맞힐 수 있는 문제

‘시험을 치른 학생 중 97.7%가 틀린 답을 냈다’. 지난 6월9일 시행된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에서 가장 오답률이 높은 문제는 수학영역 공통 22번 문항(EBS 집계)이었다. 100명 중 2명 정도만 정답을 맞혔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굳이 출제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변별력’ 때문이다. 고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해 대학 교육을 받을 수준이 됐는지를 측정하기보다는 점수에 따라 학생의 등급을 나누려는 목적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015 개정 수학과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근거”해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기본 개념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종합적인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문항을 출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어떤 문제는 이 설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학생을 가려내기 위한’ 목적으로 교육과정에서 벗어난 내용이 실제 문제로 나온다. 오답률이 가장 높았던 수학영역 공통 22번 문항에 나오는 함수는 무리식, 절댓값, 유리함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합성함수였다. 2015 개정 교육과정 ‘함수의 극한’ 단원은 평가 방법으로 ‘복잡한 합성함수의 절댓값이 여러 개 포함된 함수와 같이 지나치게 복잡한 함수를 포함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고 명시했지만 유명무실한 문구에 불과했다.

흔히 ‘킬러 문항’이라 불리는 이런 고난도 문항의 문제는 단지 ‘어렵다’가 아니다. 교육과정을 벗어나 있어 선행학습과 사교육을 유발한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교육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의원실이 지난 24일 ‘6월 수능 모의평가’ 수학영역 문제를 분석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공통·선택과목을 통틀어 46개 출제 문항 중 11개(23.9%)가 고교 교육과정 수준과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치른 6월 모의평가(6개 문항)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대체로 공통과목 20~22번, 선택과목 29~30번에 배치된 5개 문항이 오답률 80%가 넘는 대표적 킬러 문항들이다. 배점이 가장 높은 4점짜리 문항이기도 하다. 어려워서 푸는 시간도 더 걸리니 배점을 높이는게 당연해 보인다. 거꾸로 보면 교육과정이나 학교 수업과 무관하게 별도의 공부를 한 학생만이 좁은 틈새를 뚫고 높은 점수을 챙겨갈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김상우 사걱세 수학교육혁신센터 연구원은 “오답률이 88%에 달했던 20번 문항을 예로 들면, 공통과목 교육과정을 벗어난 문항인데 선택과목 ‘미적분’에서 다루는 합성함수 미분법을 이용하면 더 빠르게 풀 수 있다”며 “이런 문항 때문에 사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은 물론 다른 선택과목 ‘확률과 통계’나 ‘기하’를 고른 학생도 불리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는 왜 ‘수포자’가 많을까···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변별력’ 집착

변별력 좇다 심해지는 ‘빈익빈 부익부’

수학을 포기하는 ‘수포자’는 이렇게 탄생한다. 5지선다형 문항만 있는 국어나 영어 등 다른 과목과 달리, 보기가 없는 단답형 문항이 있는 수학영역에선 아예 ‘찍기’조차 불가능한 고난도·고배점의 문항에 원점수 100점 만점 중 20점 이상이 배정된다. 1993년 이래 올해로 서른 번째 수능이 치러지는데 이런 배점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수능뿐 아니라 학교에서 보는 중간·기말고사도 ‘변별력’이 당연한 전제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에 수학을 지레 포기하는 학생이 생겨난다. 뒤이어 사교육을 활용할 수 없는 형편의 학생과, 사교육을 통해서도 도무지 수학 문제를 풀어낼 요령을 찾지 못한 학생이 수포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수학자인 박형주 국가교육과정 개정추진위원장(아주대 석좌교수)은 “변별력의 늪”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동안 교육과정을 개정해가며 들인 노력들이 죄다 이 늪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수학이 어렵다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행렬과 벡터 등 중요한 단원들까지 과감히 배제해가며 교과내용을 줄였지만 시간적 여유를 활용해 학생 개개인의 이해도를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짧은 시간 안에 어려운 문제가 여럿 들어있는 시험에 대처하려는 기술만 늘리려 하다보니 반복학습만 시키는 쪽으로 흘렀다”고 말했다. 이어 “게다가 내용을 줄여 확보한 시간에 수학적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 대신 학생을 반복의 덫에 가둬둔 결과 잘 하던 학생마저 질려서 지긋지긋해 한다”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도 그러지 않았나”고 말했다.

교육현장에선 ‘수학을 포기하는 세태’가 교육 전반에 늘어난 불신을 방증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 6월 발표한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와 이에 병행해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가치, 흥미, 학습의욕은 일제히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 학년인 중학교 2학년에서 수학에 대해 ‘가치 낮음’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20년 15.5%에서 지난해 17.3%로, ‘흥미 낮음’은 23.3%에서 25.8%로 높아졌다. 반면 ‘자신감 높음’ 비율은 34.7%에서 31.9%로, ‘학습의욕 높음’은 52.9%에서 50.3%로 떨어졌다. 서울 소재 중학교의 한 수학교사는 “같은 재단의 중·고교를 오가며 수업을 해보니 예전에는 고등학교 들어서 수포자가 확 늘었는데 최근 들어 중학교부터 포기하는 학생이 늘고 있음을 체감한다”며 “유독 수학시간에는 떠들지도 않을 정도로 의욕도 활기도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현직 고교 수학교사인 송영준 전국수학교사모임 미디어국장도 교사의 머리 속부터 변별력이 강박관념처럼 자리잡은 현실을 지적했다. 송 국장은 “수학교사들이 문제를 낼 때부터 이미 변별력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수포자 양산의 출발점”이라며 “자연히 학생들도 수학 시험은 원래 어려운 것이라 생각해 제대로 공부를 하기도 전에 포기해버리고 만다”고 말했다.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수학적 추론능력과 실생활에서의 응용능력 등 교육효과가 원천 차단되고 있다. 송 국장은 “물론 어느 과목에나 그렇듯 수학도 소질이 없는 학생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런 학생도 포기하지 않고 기본적인 응용능력을 키우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어려운 시험과 수업의 영향으로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한국의 순위가 높게 나오는 면이 있다 해도 그 이면에는 불필요한 경쟁이 일상화되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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