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새 클래식

백승찬 기자
영화 <잔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브뤼셀 1080>의 한 장면

영화 <잔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브뤼셀 1080>의 한 장면

영국의 권위있는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1952년부터 10년에 한 번씩 평론가, 프로그래머, 학자들의 투표를 통해 ‘역대 최고의 영화’ 100편을 선정하고 있다.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이 1962년부터 2002년까지 5회에 걸쳐 1위를 하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이 2012년 1위에 선정됐다. 작고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를 두고 “수많은 ‘최고의 영화’ 리스트 중에서도 대부분의 진지한 영화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리스트”라고 표현했다.

최근 공개된 2022년 투표 결과는 이변이었다. 벨기에 감독 샹탈 아커만(1950~2015)이 25세 때 연출한 <잔 딜망, 코메르스가 23번지 브뤼셀 1080>(1975)이 여성이 연출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전 7번의 리스트에선 여성 감독의 영화가 10위권 내에 든 적도 없었다. <현기증>과 <시민 케인>은 각각 2, 3위로 내려갔다.

<잔 딜망>은 2012년 36위로 리스트에 처음 진입한 뒤 10년 만에 1위가 됐다. 이 영화는 3시간21분의 상영 시간 동안 잔이라는 여성의 3일간 일상을 별다른 기교 없이 건조하게 보여준다. 잔은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잔이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정황도 흐릿하게 암시된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아커만은 종종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는 영화를 해방의 힘으로 전환시킨다”고 말했다. 영화학자 이본 마굴리스는 아커만의 영화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구스 반 산트,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토드 헤인스, 지아 장커 등 이후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제작된 지 반세기 가깝게 지난 영화의 평가가 갑자기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에 참여한 사람의 수가 늘었다. 2012년 조사에는 846명이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그 2배 가까운 1639명이 응했다. 더 많은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려는 시도가 참신한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마이크 윌리엄스 편집장은 뉴욕타임스에 “스트리밍 서비스와 디지털 소통방식 덕분에 과거 덜 주목받던 의견, 영화들이 조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리스트에는 <잔 딜망> 외에도 여성 감독의 영화가 다수 진입했다. 2012년에는 <잔 딜망>과 클레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1998)뿐이었는데, 올해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 14위),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30위) 등 11편의 여성 감독 영화가 뽑혔다. 10년 전 1편이었던 흑인 감독의 영화는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1989, 24위) 등 7편으로 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1988, 72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75위)은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리스트에 올랐다. 봉준호의 <기생충>(2019, 90위)은 리스트 내 유일한 한국영화였다.

일본의 철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 신곡 강의>에서 ‘클래식’의 의미를 설명했다. ‘클라시스’는 라틴어로 함대를, ‘클라시쿠스’는 국가에 함대를 기부할 정도의 부자를 뜻했다.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을 맞아 국가에 기여하는 부자처럼, 삶의 위기에서 정신적인 지지대가 되어 줄 만한 작품이 ‘클래식’이다. 근대 일본인들은 이를 ‘고전’이라고 번역했다.

고전은 인간의 심성을 보듬고 지혜를 전한다. 보편적인 인간성에 호소하기에 유행을 타서 사라지지 않으며, 때로 인간의 수명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다만 시대에 따라 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조건,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에 <잔 딜망>은 영화 아카이브에서 불려나와 재조명되고 있다. 불평등과 이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사회가 도래했기에 3년 전 공개된 <기생충>이 1895년 <기차의 도착> 이래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로 꼽힐 수 있었다.

10년 뒤에는 어떤 영화가 ‘새로운 고전’으로 등극할까. 나의 삶을 살고 사회의 변화를 관찰하며 2032년의 리스트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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