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 문화부장

경기도를 대표하는 복합예술공간인 경기아트센터의 사장 자리는 9개월째 공석이다. 최근 새 사장 공모가 마감됐으나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된다 해도 최종 임용은 11월에나 가능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시절 임용됐던 전임 사장이 올해 1월 이재명 대선 캠프 합류를 위해 임기를 마치지 않은 채 떠났고, 도지사 공백기와 대선이 맞물려 새 사장을 뽑지 못했다. 경기아트센터는 지난해 대략 짜두었던 공연 프로그램을 올 한 해 큰 무리 없이 소화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기관을 대표하고 조직을 혁신하며 새 비전을 제시하는 수장의 역할은 ‘직무대행 체제’로서는 해내기 어렵다. 잘해봐야 ‘현상 유지’다.

백승찬 문화부장

백승찬 문화부장

인물은 교체됐지만 당적은 같은 지자체장을 맞이한 경기아트센터는 사정이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자체장의 당적이 바뀐 곳에서는 조직 자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강릉국제영화제,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그렇다. 강릉과 강원도는 지자체장 당적이 더불어민주당에서 국민의힘으로 바뀌었다. 교체된 단체장은 전임 시절 신설된 영화제의 폐지 혹은 축소를 추진했다. 강릉시는 영화제 예산을 출산장려정책에 사용하겠다고 했고, 강원도 역시 내년도 영화제 예산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영화제 관계자나 영화제를 찾은 시민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두 영화제는 생긴 지 3~4년 안팎이지만, 26년 역사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지 논의도 시의회에서 나왔다는 점은 놀랍다.

예술 지원책엔 뭔가 문제가 있다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그룹 방탄소년단(BTS) 역시 국내 정치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 홍보대사를 맡은 BTS는 내달 15일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무료 콘서트를 연다. 그룹 활동의 잠정 중단을 선언한 BTS가 이례적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다. 게다가 이 콘서트를 여는 데 드는 비용 70억원까지 BTS 소속사인 하이브가 부담한다. 논란이 일자 하이브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로 참여했다. 비용 문제는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정치인들이 BTS의 병역특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이브의 공식 입장 이면의 BTS 멤버 속내가 궁금해진다.

아무리 “난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해도 실제로 정치와 무관한 일은 없다. 정치는 미국과의 외교, 물가 상승, 검찰 수사권 조정 등 이슈뿐 아니라 출근길 지하철의 배차간격이나 퇴근 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관람 행태 같은 미세한 일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의 국정 과제, 국회의 입법, 지자체의 정책 등이 모두 그렇다.

소수 정치인의 고집, 몽상, 욕심에 우리의 삶이 좌우되는 걸 가만히 두고 보자는 말은 아니다.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며 다음처럼 이었다. “(성인은) 정치를 하면 누구라도 편안하게 다스리며 일을 할 경우에는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며 시절의 변화를 그대로 탄다.”

최상의 정치는 그 작동 방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되, 중앙정부, 국회, 지자체의 영향력이 미쳤는지는 드러나지 않게 한다. 좋은 정책은 시혜적이지 않다.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작품 활동을 이어간 젊은 예술가가 훗날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큰 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보조금 정책 관련 공무원이라면, 이 지원책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사례에서 정치는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 만물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스스로 존재를 과시하고 영향력을 드러낸다. 문화 분야의 자율적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문화인들의 성취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문화를 정치권력의 전리품처럼 여기거나, 정치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신구처럼 취급한다.

정치는 음지서 사람들의 삶 도와야

정치에 과몰입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정치 과몰입은 극소수의 영웅적 정치인이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개선시켜 준다거나, 집권당이 바뀌면 지상낙원이 펼쳐질 것이라 믿는 증상을 뜻한다. 가까운 일본, 중국, 북한과 달리 한국은 수차례의 정권 교체를 겪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정치의 영향력은 크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음을 방증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러니 정치는 양지에서 별나게 스스로 드러내기를 멈추고, 음지에서 사람들의 삶을 돕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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