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트라우마 정부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겨우내 붉은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에 선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여름이 되자 연보라색 반팔티로 갈아입었다. 지난 8일부터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한 유가족은 시청 앞 분향소에서 국회까지 매일 행진한다. 헌법재판소에서 심리 중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과 이태원 참사의 독립적 조사기구 설립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서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17일 오전, 유가족들이 헌재에 제출할 의견서를 마련하기 위해 모인 자리를 참관했다. 고통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하기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토론이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그 자리에 법률가와 함께 인권활동가가 참여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법에 고통의 색을 입히는 작업은 유가족들이 생생하게 경험한 인권침해와 부정의를 법과 대질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유가족에게 이상민 장관이 탄핵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재난안전법상의 의무를 위반한 것, 즉 참사 당일 중대본을 신속하게 가동하지 않고 중수본을 설치하지 않아 구조와 수습과정에서 피해가 가중된 것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참사의 수습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유가족에게 참사의 수습이란 어질러진 길거리를 청소하는 것과 같이 참사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온전히 생존하기 위해 이태원 참사를 우리 삶과 정치에서 몰아내서는 안 된다는 호소와 인정의 과정이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가족과 일상을 이어가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참사 이후의 사회’다. 생명에 대한 무력한 냉소는 각자도생을 넘어 불평등한 생존을 무기력하게 강화한다. 보라색 행진을 가로막으며 놀다가 죽었다는 욕설이 건설 ‘노가다’들의 생존을 위한 죽음을 애도할 리 없다. 또한 빨갱이, 테러, 재난 운운으로 이어지는 장구한 노조혐오의 역사에서 혐오선동정치가 배후에 없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정치권력이 유족의 싸움을, 참사로 훼손된 국민의 생명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 당연한 이야기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

지금 정부는 재난 트라우마 정부다. ‘세월호 트라우마’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를 정권의 위협으로 간주하더니, 화물연대 파업을 국가재난상황으로 규정해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광우병 트라우마’로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 괴담과 허위사실 유포라며 강력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참사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정부에 재난은 병리적이다.

17일 저녁, 여의도에서는 방탄소년단 10주년 페스타가 열렸다. 국무총리가 인파사고 예방을 위한 특별지시를 내렸고, 경찰은 1000여명의 추가 인원을 투입했다. 분명 이태원 참사 이후 인파밀집에 대한 위험이 사회적으로 인식된 효과다. 동시에 이태원 참사로 인해 글로벌한 이슈가 된 재난관리 실패의 이미지를 만회할 절호의 글로벌 찬스이기도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안전의 현재는 여의도 밤하늘을 수놓은 보라색 불꽃과 보라색 유가족들의 선명한 구별로 나타났다. 정부가 안전을 강조할수록 치안은 강화되고, 집회는 불법화된다. 정치적이고 경제적 이익이 셈해지는 것만이 안전의 테두리에서 보호받고 보장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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