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뮤지컬로 재현한 이순신의 삶 ‘순신’…화려한 볼거리, 기묘한 연출

허진무 기자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의 소리꾼 이자람(앞쪽)과 ‘이순신’ 역의 무용수 형남희(뒤쪽). 서울예술단 제공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의 소리꾼 이자람(앞쪽)과 ‘이순신’ 역의 무용수 형남희(뒤쪽). 서울예술단 제공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용수 형남희가 이순신을 연기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제공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용수 형남희가 이순신을 연기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제공

이순신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원귀(寃鬼)들이 이순신의 발목과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원귀들 중에는 해전에서 무찌른 왜군뿐만 아니라 군영의 질서를 어지럽혀 사형된 조선군도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의 전황뿐 아니라 개인의 고독과 번뇌가 고스란히 기록됐다. 현대 한국인은 이순신을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불패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한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드러난 이순신은 병든 몸을 이끌고 사방의 적들과 괴롭게 싸우는 한 인간이었다.

서울예술단의 신작 <순신>은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기록한 꿈과 실제 행적에 상상력을 더한 ‘창작가무극’이다. 판소리, 뮤지컬, 무용이 결합했다. 연출가 이지나, 소리꾼 이자람, 음악감독 김문정, 무대디자이너 오필영 등이 모인 창작진은 ‘드림팀’ 수준이라 화제였다.

기자가 관람한 지난 10일 공연에선 소리꾼 이자람이 해설자 역할인 ‘무인’으로 출연했다. 판소리로 인물과 장면을 묘사하며 극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이자람은 작창(作唱·소리를 짓고 대사를 입히는 작업)까지 도맡아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소리가 자연스러웠다. 이순신 역은 무용수 형남희가 맡았다. 1막의 대사는 전혀 없고, 2막의 대사도 극히 적다. 대신 몸을 움직여 이순신의 감정과 내면을 표현했다. 큰 키와 긴 팔다리를 힘껏 이용해 몸부림치고, 뛰어오르고, 기어가고, 넘어졌다.

한산·명량·노량 해전 장면에선 이자람의 판소리가 전면에 나섰다. 휘몰아치는 판소리 곡조 자체만으로 좌중을 장악하기에 충분한 데다 무용수들의 칼싸움 대결 연출도 박력이 있었다. 일본군을 요괴처럼 분장시키고 붉은 조명을 비춰 조선군과 뚜렷한 선악 대비 구도를 만들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추악한 용모로 묘사했다.

1부가 이순신의 내면에 집중했다면, 2부에선 해전을 비롯한 화려한 볼거리가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명량대첩은 <순신>의 최고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이자람과 형남희, 무용수 20여명이 무대 전체를 뛰어다니며 치열한 해전을 구현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판옥선 13척으로 왜군 함대 133척을 물리쳤다. 진도 울돌목의 거센 해류로 왜군을 끌어들인 뒤 “지금이다!” 외치며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장면은 짜릿한 전율이 있었다. 관객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조선의 왕 선조, 충신 류성룡과 간신들, 이순신의 어머니, 막내아들 이면과 연인 하연 등의 이야기는 뮤지컬로 펼쳤다. 판소리와 뮤지컬은 한 장면에 함께 나오지 않는다. 두 장르가 섞이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보인다. 판소리와 뮤지컬 넘버의 높은 완성도에 비해 드라마는 단순하고 대사가 작위적이었다. 사극 말투와 현대 일상어가 뒤섞여 어색한 대목도 종종 있었다. 이순신이 죽음을 맞는 노량해전 장면은 이자람이 홀로 통절하게 부르는 정가(正歌)로 마무리했다. 시끌벅적한 연출 없이 호젓한 여운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의 이자람이 판소리로 전투 장면을 해설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제공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의 이자람이 판소리로 전투 장면을 해설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제공

<순신>이 이순신이라는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고 기묘하다. 이순신의 존재가 다른 인물들의 입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꿈은 이순신의 입이 아니라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이순신이 처한 극한 상황도 이순신의 입이 아니라 선조, 류성룡, 어머니 등의 주변 인물들과 무인의 입을 통해 설명된다. 이순신은 말이 없다. 그들의 입에 맞춰 몸을 움직일 뿐이다. 이순신은 극의 중심에 있지만 텅 비어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해설자 무인의 존재감이 주인공 이순신을 압도한다.

극중 어머니는 ‘순신(舜臣)’이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 살아내라, 충신으로, 그리 살아내자, 네 이름답게”라고 말한다. 실제 이순신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성군 순임금에게서 ‘순(舜)’을 따오고 형제들의 돌림자로 ‘신(臣)’을 써서 지었다. 어머니의 호명은 이순신을 ‘충무공’으로 각성하게 하는 주문이다. 이순신이라는 인간의 고통을 영웅이 겪어야 마땅한 시련으로 만든다. 초현실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말없이 몸을 움직이는 형남희의 모습이 자유의지 없이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는 존재처럼 보였다.

<순신>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오는 26일까지 공연한다. ‘무인’ 역에는 이자람·윤제원이 번갈아 출연한다. 공연 시간은 휴식 15분을 포함해 155분. 만 7세 이상 관람가. R석 9만원, S석 6만원.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의 이자람이 판소리로 전투 장면을 해설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제공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의 이자람이 판소리로 전투 장면을 해설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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