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여기 성소수자 신자도 있어요”…가톨릭 앨라이 모임의 특별한 미사

배시은 기자    김송이 기자
지난 9월 18일 서울 중구 성소수자부모모임 사무실에서 아르쿠스 10월 아르쿠스 월례미사가 열리고 있다. 아르쿠스 제공

지난 9월 18일 서울 중구 성소수자부모모임 사무실에서 아르쿠스 10월 아르쿠스 월례미사가 열리고 있다. 아르쿠스 제공

지난 20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성소수자부모모임 사무실에 들어서자 벽면에 붙은 ‘미워해도 소용없어’라고 적힌 무지개색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 책상에 흰 천을 두르자 금세 미사를 위한 제대가 마련됐다. 16명의 신자와 마주 앉은 원동일 신부는 라틴어로 ‘무지개’를 뜻하는 아르쿠스의 월례미사를 찾은 이유를 말했다. “20년 전 저를 찾아온 레즈비언 청년 신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한 것이 가슴 아픕니다. 지금 만나면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이날 이곳에선 ‘아르쿠스’의 월례미사가 열렸다.

지난해 5월 설립된 아르쿠스는 가톨릭교회 내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이다. 지난해 9월부터 매월 서울에서 가톨릭 성소수자 당사자와 지지자들이 함께 하는 미사를 열고 있다. 이날 미사에도 성소수자 당사자인 신자부터 성소수자 부모, 개신교·불교 신자 등이 모였다. 20대 여성부터 중년 남성까지 연령대와 성별도 다양했다. 각자 의자 옆에 내려둔 가방에는 무지개 리본과 배지가 달려 있었다.

미사가 끝난 후 둥글게 둘러앉은 20여명은 한 달간 있었던 일을 나누는 ‘나눔의 시간’을 시작했다. 이날 이야기의 주제는 최근 논란이 된 한 성직자의 발언이었다. 지난 14일 MBC <성지순례>에 출연한 한 신부는 “(성소수자와 관련된) 이런 질문이 종교인들한테는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라며 “옳고 그름을 떠나 ‘저희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방법을 물어봐 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이날 말문을 연 한 30대 신자는 “방송에 나온 신부가 잘 몰랐거나 당황해서 그랬을 수 있다”면서도 “성소수자들은 ‘신부에게 나를 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구조적 폭력을 받는 상황에서 신부가 폭력을 느꼈다고 한 부분은 어떤 경우에서도 잘못된 발언이었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소수자 신자들은 성당과 신부가 바뀔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성소수자 당사자라고 밝힌 20대 신자는 “신부가 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폭력적인 질문’이라고 이야기한 것 자체가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다.

아르쿠스 미사에 두 번째로 참여했다는 구본석 신부는 “얼마 전 가톨릭 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성소수자 이슈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며 “영화 GV(제작진과 관객의 대화) 중 ‘왜 신부님이 이런 주제를 다루는지’를 계속 묻더라. 왜 성소수자 문제를 신부가 다루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될까”라고 했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성소수자부모모임 사무실에서 원동일 신부가 11월 아르쿠스 월례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배시은 기자

지난 20일 서울 중구 성소수자부모모임 사무실에서 원동일 신부가 11월 아르쿠스 월례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배시은 기자

참석자들은 성소수자 신자를 향한 가톨릭교회의 뿌리깊은 차별적 태도도 논했다. 양성애자이자 모태신앙이라는 A씨(31)는 “성당에서 ‘동성애자들은 하느님 못 만난다’ ‘트랜스젠더는 악마’와 같은 혐오표현을 들었다”며 “그때마다 ‘성소수자인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라는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이날 미사를 담당한 원 신부는 “가톨릭 내부에서 성소수자 신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보수적인 신학 교육과 공존을 위한 대화가 부족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했다.

교황청은 지난 8일 트랜스젠더도 세례 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교리해석을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자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가톨릭교회가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에 대해 원 신부는 “교황은 진보적이나 교황의 주장에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해외 주교들도 일부 있다”며 “한국 천주교회도 아직까지는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아르쿠스 미사를 통해 변화의 희망을 보왔다고 했다. 2년 전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20대 레즈비언 신자는 “방송에 나온 신부의 발언이 적절하지 않았지만, 오늘 나눔의 시간에서 그 사안을 함께 이야기하며 희망을 봤다”며 “깨진 틈으로 빛이 들어오다 보면 결국에는 하얀 빛으로 가득 차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느꼈다”고 했다.

A씨는 “아르쿠스 미사에서 성소수자 친화적인 신부와 수녀를 만나면서 용기를 얻고 목소리를 내게 됐다”며 “새로운 신자들이 미사에 계속 찾아오고 함께 하고 싶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며 공동체가 천천히 확장되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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