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불러낸 건, 정치판에 구현한 웹소설 서사와 밈이었다

박광철 만화가/문화평론가

이준석, 청년들 익숙한 ‘서브컬처’로 상호작용

‘비단주머니’ ‘천아용인’ 등 정치 밈 세대교체

지난 5월 4일 전남 순천역 승강장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서성일 선임기자

지난 5월 4일 전남 순천역 승강장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서성일 선임기자

[주간경향] 최근 정치에서 흥미로운 관찰 대상 중 하나는 청년정치인이다. 과거에 비해 꽤 역동적인 청년정치가 ‘국민의힘’에서 발현되고 있다. 확실히 정치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에 몰리는 건 기존에 없던 현상이다. 청년세대의 보수화, 86세대와 경쟁 회피, 국민의힘 내부 조직력 약화 등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준석의 당대표 선출은 이 같은 흐름에서 분명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사고를 확대해보자. 이준석은 과연 ‘청년정치인’일까? 이준석 본인도 청년정치라는 말을 부인한다. 다른 청년정치인이나 활동가, 평론가들도 이준석을 청년정치인으로 규정하길 꺼리는 듯하다.

이준석은 청년정치인인가

진보 쪽에서는 오랫동안 노동시장 진입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진 현실의 문제를 지적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이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세대’이며, 이 문제를 정치나 정책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흐름을 청년운동이라고 규정해왔다. 이준석은 이런 맥락의 청년운동 의제를 자신의 주요한 정치적 화두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준석을 ‘청년정치인’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청년정치가 꼭 정체성 정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청년정치의 정의를 ‘청년세대와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정치 형태’로 범위를 넓힌다면, 이준석은 분명 청년정치인이다.

정치인 이준석은 서브컬처 문화를 정치 스타일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기존의 정치권이나 정치평론에서 많이 놓치고 있는 대목이다. 나는 그의 말과 정치적 선택 그리고 그가 활약한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이나 대선 등 특정 국면에서 형성된 정치적 역동성이 지금 20~30대에서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웹소설’의 스타일과 닿아 있다고 본다.

최근 웹소설은 젠더와 세대에 따라 양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중 남성들을 겨냥한 웹소설을 ‘남성향’이라고 부른다. 남성향 웹소설은 또 헌터물, 게임소설, 판타지, 이(異)세계, 대체역사 등 다양한 하위 장르로 나뉜다. 나는 이준석의 정치서사가 남성향 웹소설 중 ‘이세계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30대 남성들이 이준석에게 몰입되고 친밀함과 재미를 느끼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이세계물’이란 웹소설의 한 장르다. 주로 판타지 세계에 소환된 현대인이 특별한 능력을 갖고 활약하는 모험담을 그린다. 이준석에게 주어진 강력한 무기는 ‘토론’이다. 그는 기성정치인들이 짜 놓은 판에 홀로 쳐들어가 각종 전투에서 ‘무쌍’(편집자 주: 원래는 둘도 없다는 뜻의 한자어 ‘무쌍(無雙)’에서 온 단어로, 혼자서도 일당백이 가능하다는 뜻의 게임용어)을 찍으며 주인공 서사를 쓰고 있다. 당대표 선거에서 화려한 토론기술을 선보이며 경쟁자 나경원을 ‘나락’으로 보내는 모습.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후, 정치적 모략에 빠져 몰락하고 권력을 상실하는 모습.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중모색하며,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등이 모두 웹소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서사체험’에 가깝다. 이준석은 현실정치에서 이를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준석의 말을 대표하는 ‘비단주머니’의 밈은 <삼국지연의>에서 시작된 ‘금낭묘계(錦囊妙計)’다. 지금도 장르소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클리셰다. 이처럼 서사의 힘은 강력하다. 대중은 이준석이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전달한 비단주머니의 상세 전략까지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비단주머니’ 자체는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이준석은 이런 ‘서사’의 작동 원리를 기민하게 활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다.

지난 2월 6일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천하람 전남 순천 당협위원장과 최고위원에 출마한 허은아·김용태 후보, 그리고 청년 최고위원으로 출마한 이기인 후보가 국회 앞 잔디밭에서 ‘윤핵관’ 퇴진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인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인·허은아·천하람·김용태  /박민규 선임기자

지난 2월 6일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천하람 전남 순천 당협위원장과 최고위원에 출마한 허은아·김용태 후보, 그리고 청년 최고위원으로 출마한 이기인 후보가 국회 앞 잔디밭에서 ‘윤핵관’ 퇴진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인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인·허은아·천하람·김용태 /박민규 선임기자

그를 지지하는 4명의 청년정치인을 상징화하는 방식, 즉 ‘천아용인’이란 용어도 흥미롭다. 천(天), 용(龍), 인(人)은 무협지에서 지겹도록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심지어 ‘천아용인’에서 가운데 글자인 ‘아’를 제외하면 일본의 인기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천룡인’이란 세계귀족집단의 호칭이 된다.

장르문화에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이런 단어들을 통해 천아용인은 자연스럽게 이준석을 호위하는 사천왕이나 던전 레이드가 떠날 때 주인공의 곁을 지키는 ‘파티’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한동훈은 20~30대 정치커뮤니티에서 “조선제일검”이라고 불린다. 한동훈은 그러나 자신에게 형성된 서브컬처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준석과는 다르다. 이준석의 이 같은 스타일은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장악해온 보수정당 ‘국민의힘’의 이미지를 20~30대 남성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김어준과 이준석, 인터넷 밈의 세대교체

이쯤에서 진보진영의 정치 밈(Meme)과 보수진영의 정치 밈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이 한국 정치의 핵심적인 활동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이후부터 진보진영은 인터넷 밈의 주도권을 잃어본 적이 없다. ‘누리꾼’이란 말은 오랫동안 보수진영에서 미지의 공포와 같은 것이었다. 대표주자는 김어준. 그는 “졸지 마 시바”라고 외치며, 팩트와 음모주장·유머를 적절히 섞은 독자적인 정치콘텐츠를 생산해왔다. 지금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콘텐츠 생산자인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보수진영엔 ‘미지의 공포’가 현현한 ‘코즈믹 호러’의 괴수였다.

이제 청년 세대들은 ‘졸지 마 시바’라는 말보다 ‘비단주머니’나 ‘천아용인’과 같은 밈에 더 열광한다. 이준석은 그동안 김어준이 장악해온 ‘정치콘텐츠(밈)’의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김어준도 이젠 늙어간다.

최근 이준석의 인터뷰와 토론을 보면 자신의 고난을 담백하면서도 절절하게 고백하는 순간들이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어 국민의힘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후, 대통령과 독대 자리에서 경기도지사 패배의 책임을 추궁당한 순간을 회고할 때 깊은 울분 같은 게 느껴졌다. 이는 ‘고난서사’에 해당한다. 이준석이 ‘싸가지없음’의 정체성에 ‘고난서사’를 더한 셈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변모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국면의 빌드업은 끝났다. 만약 총선에서 이준석이 살아남는다면 이야기는 최종국면인 대선으로 넘어간다. 이준석은 과연 ‘별의 순간’을 만날 수 있을까? 그건 지금 그가 쓰고 있는 ‘고난서사의 완성도’에 달려 있다.

물론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이준석이 써 내려갈 서사의 완성은 한국사회의 발전과 무관하고, 오히려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 논의는 차후를 기약하자.

<박광철 만화가/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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