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은 언제부터 거래에 사용됐을까…서울 인장포의 역사

김보미 기자
1985년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터를 잡은 인장포 ‘인예랑’ 황보근 대표의 전각 작품.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85년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터를 잡은 인장포 ‘인예랑’ 황보근 대표의 전각 작품.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명과 거래가 전산화되고 생체인증까지 등장하면서 옛 문물이 된 인장문화가 최근 문화상품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탯줄 도장, 수제 도장, 한글 캘리그래피 디자인 등 ‘굿즈’로 소장하려는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과거 특별한 계층만 가질 수 있었던 도장은 도시화와 함께 확산해 서민 생활사를 담은 고유한 유산이다. 도장으로 본인 등을 확인하는 인감은 한국·일본·대만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이기도 하다.

10일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서울의 인장포’ 보고서를 보면 개인별 도장을 갖고 사용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다.

조선시대 인장은 임금의 새보(璽寶)와 관청에서 쓰던 관인(官印), 개인이 가진 사인(私印)으로 구분됐다. 임금의 명으로 행해지는 문서나 외교문서에 썼던 인장은 옥(玉)으로 만든 새(璽)와 금으로 만든 보(寶)가 있었다. 개인이 사용하던 인장인 사인(私印)은 서화에 찍는 낙관(落款)이나 서적의 장서인(藏書印) 정도만 존재했다.

1910년대 제작된 인판대장.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0년대 제작된 인판대장.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인장을 파게 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면서다. 조선총독부가 조선 내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4년에 인간증명규칙을 반포해 강제 도입한 것이다. 이에 앞서 1912년에는 인판업취제규칙을 제정해 인장업을 처음 제도적으로 규정했다.

‘옥새당’을 운영하는 이동일씨(85)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일반 상업으로 인장이 시작됐다”며 “인감 규칙이 생겨 모든 서류에 인장을 찍어서 본인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인장포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국가 차원에서 인감제를 실시하면서 인장을 전문으로 제작해 주는 인장포가 생겨났고 1974년 국가기술자격법 시행으로 인장공예기능사(1급·2급·기능사보) 자격시험 제도가 도입됐다.

인판업취제규칙은 1999년 인장업법이 폐지되면서 87년 만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인장과 관련한 현행법은 인감증명법이 유일하다. 인장공예기능사 역시 응시 수요 감소로 2004년에 폐지됐다.

인장포는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손재주가 있는 상경민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업종이었다. 책상 하나만 있으면 작업할 수 있어 창업 진입장벽이 낮았던 것이다. 인쇄소·문구점 등의 한쪽 공간을 공유하는 ‘겹살이’가 많았다고 한다. 도심 대형 문구점이나 창신동·인현동 인쇄소에는 ‘인장부’도 있었다.

1960년대 서울 시내 인장 노점 모습. 홍순태·한영수 작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60년대 서울 시내 인장 노점 모습. 홍순태·한영수 작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6·25전쟁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수많은 지역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면서 인장포 숫자도 급증했다.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는 서울 인장포 5곳은 모두 1950년대 이후 상경한 지방민이 운영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자를 공부했고,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창신동 ‘거인당’ 대표 유태흥씨(83)는 “서울 인장포는 5·16 이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문을 연 것”이라며 “그때부터 서울에 회사가 많이 생겨서 반도호텔 주변이 다 회사였다. 도장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인쇄 기술자보다 인장 기술자가 훨씬 벌이가 좋았다”고 전했다.

특히 과거 관공서에서 문서 처리에 사용하는 인장은 300~400종에 달했다. 많을 때는 한 가게에 조각사가 5~6명이 일해 1970년대 인장포 사장은 도장을 새기지 않고 세를 받으면서 재료만 취급하기도 했다.

1960~1980년대 압축 성장한 서울에서 인장포는 대표 상점가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 집중됐다. 저층 건물의 상가를 임차한 가게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고층 건물과 넓은 도로를 건설하는 도심 재개발로 잦은 이전을 하며 부침을 겪었다. 구로공단, 여의도 개발 등에 따라 이동했다.

한국인장협회 조규호 회장(67)은 “중구 다동 58번지에서 처음 인장을 배워 옮기고, 구로공단 한일은행 바로 옆에 있다가 1977년에 대일사를 개업했다”며 “거기서 2년 있다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이 있는 중앙빌딩으로 갔다. 1980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여의도는 풀밭이었다”고 말했다.

1950년대 후반 서울 중구 소공동 ‘대영인쇄사’ 모습. 한영수 작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50년대 후반 서울 중구 소공동 ‘대영인쇄사’ 모습. 한영수 작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2000년대 들어 컴퓨터 인장 제작, 전자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고 공인인증서가 도입되면 인장업은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다.

이번 보고서에는 1950년대 문을 열어 지금까지 서울에 남아 있는 박인당(博印堂)·거인당(巨印堂)·옥새당(玉璽堂)·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인예랑(印藝廊) 등 인장포 5곳의 독특한 정체성이 담겨 있다.

서울미래유산(2020-004호)로 지정된 박인당은 1978년부터 관철동에 터를 잡았다. 대표 박호영씨(86)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출생한 피란민으로 6·25전쟁을 겪으며 피란민 배급 도장을 만든 것이 계기가 돼 인장업에 뛰어들었다. 1975년 신세계백화점 본점 인장 코너를 시작한 옥새당 이동일씨(85)는 1961년에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해 생활비를 벌려고 도장을 파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최병구 관장은 “인장은 한국·일본·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의 특수한 문화이지만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인장의 전승 단절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인장 세공 기술과 도구를 현장 조사 방식으로 기록한 이번 조사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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