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입틀막’뿐이랴···그 밑에 흐르는 ‘가만히 있으라’식 국정기조

전지현 기자    이예슬 기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생이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대전 카이스트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다 쫓겨나고 있다. SNS 갈무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생이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대전 카이스트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다 쫓겨나고 있다. SNS 갈무리

“R&D(연구·개발) 예산 복원하십시오! 생색내지 말고 R&D 예산 복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지난 16일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이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대해 항의하다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 연행당한 사건 이후 윤 대통령과 정부의 소통 방식에 대한 여론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달 강성희 진보당 의원도 “국정 기조를 바꾸셔야 됩니다”라고 발언하다 입이 막힌 채 끌려나갔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시민의 입을 막고 사지를 들어 연행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올해 들어서만 한 달에 한 번꼴로 발생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정부가 이처럼 비판이나 이견을 틀어막는 이른바 ‘권위주의적 통치’를 일삼는다는 지적은 비단 이 같은 물리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 때 전 국민이 들어 기억하고 있는 “가만히 있으라”가 연상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대표적으로 꼽히는 사례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 방영 연기다. KBS 제작진이 준비해온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는 오는 4월 10주기에 맞춰 방송될 예정이었으나,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방송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편성 변경을 지시한 제작본부장은 윤 대통령이 임명한 박민 KBS 사장 부임 이후 임명된 인물이다. 그러자 10년 전 세월호 참사 때 사회를 뒤흔든 “가만히 있으라”는 구호가 SNS를 중심으로 다시 소환됐다. 누리꾼들은 엑스(구 트위터) 등에 “찍지도 말고 틀지도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는 거 아니냐”고 공분했다. 세월호 선원들이 희생자에게 되풀이해서 방송한 이 구호는 참사 이후 구조적 참사를 막지 못한 기성세대의 반성과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반어적 의미로 주로 쓰였다.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청부민원’ 이해충돌 의혹을 고발한 내부 직원은 오히려 경찰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류 위원장이 가족·지인들을 동원해 뉴스타파를 심의·처벌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류 위원장은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방심위 안에선 특별감사가, 방심위 밖에선 경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윤석열 정부는 비판과 이견을 듣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른바 ‘바이든-날리면’ 보도 자막을 문제 삼아 대통령실은 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거부했고, 김건희 여사가 참석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예술인들이 강제연행됐다. 대선 때 약속한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카이스트 ‘입막음·연행’ 사태의 기저에 깔린 윤석열 정부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비판했다.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대통령의 발언을 반대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데, 경호원이 강제로 입을 틀어막았다”며 “권위주의 시대, 군부독재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최요한 시사평론가는 “대통령에게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잘한 사건들이 쌓이는 상황”이라며 “국민이 보기에는 ‘말을 못 하게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고 느껴질 법한 일들이 부슬비에 옷 젖듯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현 정부의 대국민 불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도어스테핑 거부부터 이번 KBS 단독 신년대담까지, 불통의 이미지가 쌓이는 중 과잉 경호 문제가 나왔다”라며 “원하지 않는 얘긴 듣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고 했다.

1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R&D 예산 삭감·졸업생 강제 연행 윤석열 정부 규탄 카이스트 동문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R&D 예산 삭감·졸업생 강제 연행 윤석열 정부 규탄 카이스트 동문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카이스트 동문 10여 명은 지난 17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행사의 주인공인 졸업생의 입을 가차 없이 틀어막고 쫓아낸 윤석열 대통령의 만행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누리꾼들은 SNS를 통해 “1월엔 국회의원이더니 2월에는 학생이냐” “현대판 독재국가 아니냐” “무서워서 자기 의견 말하겠냐”는 등의 반응을 쏟아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 출신인 박철완 서정대 교수가 누리꾼들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박 교수는 SNS에 “R&D 예산 건은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 두 사람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등이 한 것이니 거기에 먼저 가서 따지라”며 “여기 가서 따지지도 못하면서 대통령에게만 따지면 그건 정치행위”라고 올렸다. 누리꾼들은 “대학생은 정치행위를 하면 안 되나” “행정부의 모든 결정은 대통령이 책임지는 게 기본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참여연대는 18일 논평에서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의사를 고려해 합리적인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비판의 목소리도 겸허하게 경청해야 할 의무를 포함한다”며 “정부의 행태를 보면 비판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불통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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