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과 숨결, 향···나무와 내가 하나되는 순간 톱을 들었다

이영경 기자

국제갤러리 개인전 여는 ‘나무의 조각가’ 김윤신

알가로보의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생명력

팔로산토의 돌과 같은 단단함

근육과 숨결, 향을 지닌 나무는 인간과 같은 존재

작업을 하기 위해 나무를 살펴보고 있는 김윤신 작가.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작업을 하기 위해 나무를 살펴보고 있는 김윤신 작가.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김윤신 작가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김윤신 작가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미술관 옆 식물원] 근육과 숨결, 향···나무와 내가 하나되는 순간 톱을 들었다
미술관에는 수많은 식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만난 식물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미술관 옆 식물원’ 코너입니다. 그림 속 식물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미술을 즐기는 또다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전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식물에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거친 통나무가 쌓여있는 작업실, 작업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백발의 노인이 굉음이 진동하는 전기톱을 들고 익숙한 솜씨로 나무를 가르기 시작한다. 굵고 단단한 나무가 톱밥을 토해내면서 뽀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난다. ‘톱질’은 조각가 김윤신(89)이 40년 동안 쉼 없이 해 온 작업이다.

김윤신은 ‘나무의 조각가’다. 상명여대 미대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낯선 땅 아르헨티나에 40년 동안 ‘멈춘’ 것도 나무 때문이었다. 조카가 있던 아르헨티나에 방문했다 드넓은 자연, 굵고 큰 나무에 매료됐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하늘을 향해 마음대로 팔을 뻗어나간 강인한 나무들에서 김윤신은 평화와 자유를 느꼈다.

아르헨티나는 하늘과 땅이 하나예요. 넓은 지평선이 펼쳐지죠. 그렇게 넓은 곳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는게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때 우리나라는 전쟁 후라 남아있는 나무들이 하나도 없었어요. 당시 전쟁이 얼마나 무서웠고, 부모님들이 어려움 속에서 살았는지 여러분들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다가 그곳에 가니까 너무 평화롭고 마음이 편안했어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나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죠.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알가로보, 팔로산토 등 이국적인 이름의 나무들이 김윤신이 사랑한 나무들이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에서도 이 단단한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나무들의 특징에 대해 설명할 때 김윤신의 말에 생기가 돌고 애정이 묻어났다.

알가로보(Algarrobo)는 김윤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나무다. “알가보로는 물이 없고 단단한 자갈이 있는 땅에서 자라요. 알가로보는 아주 생명적인 나무예요. 나무를 잘라도 계속 숨을 쉬고 절대 변하지가 않아요. 바티칸에서 처음 신부가 되는 분들의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잘라 이 나무로 만든 나무 상자에다가 보존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알가로보를 조각해 만든 작품들은 단단함이 유난히 강하게 느껴진다. 알가로보 나무 특유의 붉은색감과 은은한 광택이 살아있고, 톱질로 드러난 나무결이 가지런하다. 알가로보 나무는 높이가 20m까지 자라며 산과 평원, 사막 등 건조한 지역에서 자란다.

알가로보 나무를 사용해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 1992-1’. Algarrobo wood, 42 x 47 x 31 cm 국제갤러리 제공

알가로보 나무를 사용해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 1992-1’. Algarrobo wood, 42 x 47 x 31 cm 국제갤러리 제공

알가로보 나무로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 2000-653’, Algarrobo wood, 74 x 63 x 25 cm 국제갤러리 제공

알가로보 나무로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 2000-653’, Algarrobo wood, 74 x 63 x 25 cm 국제갤러리 제공

팔로산토(Palo Santos) 또한 김윤신이 좋아하는 나무다. 소나무와 레몬, 민트가 혼합된 독특한 향을 내뿜는 팔로산토는 스페인어로 ‘거룩한 나무’란 뜻이다. 남미 안데스 지역에서는 고대부터 치유와 정화의식에 많이 사용됐다. 팔로산토 나무를 태우면 나는 특유의 향이 긍정적 에너지를 준다고 믿었다. 팔로산토를 스틱이나 칩 형태로 만들어 방향제나 아로마테라피 용도로 흔히 사용한다. 작은 칩과 스틱으로 만나는 팔로산토 나무의 본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다. 김윤신은 “돌같이 단단한 나무”라고 말한다. “팔로산토는 바닷물에 넣어도 가라앉을 정도로 무거워요. 팔로산토는 배 밑에 깔아서 집어넣으면 썩지 않고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죠.”

팔로산토로 만든 작품은 알가로보와 또다른 느낌을 준다. 팔로산토로 만든 작품은 장승과 같이 우뚝 솟았다. 한국 전통의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을 연상시키는 작품은 팔로산토 나무가 지닌 영적인 의미와 잘 어우러진다. 이밖에도 라파초 나무, 칼덴 나무, 케브라초 나무, 올리브 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김윤신의 손을 거쳐 작품으로 탄생했다.

팔로산토 나무로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 Palo Santos wood, 155 x 41 x 39 cm 국제갤러리 제공

팔로산토 나무로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 Palo Santos wood, 155 x 41 x 39 cm 국제갤러리 제공

저는 나무를 굉장히 좋아해요. 나무는 살아있고, 숨을 쉬고 있어요. 나무가 풍기는 향이 있고, 근육의 질이 있고, 숨결이 있어요. 우리도 자연이잖아요.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 형태만 다른 거지,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라는 점에서는 다 똑같은 거 아니겠어요?

40년 넘게 나무로 조각을 해온 김윤신은 나무의 근육과 숨결마저 느낄 수 있다. 지구상의 숨쉬는 생명체로 인간과 동등한 존재, 김윤신이 나무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의 작품론이자 작품명이기도 한 ‘합이합일 분이분일’(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 그렇게 만난 합이 다시 둘로 나뉘어 각각 또 다른 하나가 된다는 뜻)은 김윤신이 작업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나무의 생명력을 내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 재료가 주어지면 며칠을 두고봐요. 나무가 단단한가 연한가, 껍질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 향이 나오는지…. 주어진 재료와 내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에 톱을 들고 잘라내기 시작하죠. 나무가 갖고 있는 단단한 부분을 더 표현하기 위해서 톱의 터치를 더 강하게 내고, 변화를 주는 작업을 통해서 내가 또 하나의 생명으로 잉태된 것을 합과 분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하고 있어요.”

김윤신 작가가 19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작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윤신 작가가 19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작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윤신 작가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김윤신 작가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국제갤러리 유튜브 캡처

김윤신의 ‘나무사랑’은 유년시절부터 시작됐다. 나무를 좋아해 타고 오르며 놀았다. 일제강점기였던 유년시절, 어느날 나무들이 베어져 온통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나무를 세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나무에 조각을 해 새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남미의 나무에 반해 40년 간 남미에 머물던 김윤신은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가 주목받으며 한국 미술계에서 재조명됐다. 지난해 국제갤러리, 리만머핀 갤러리 등 상업갤러리와 최초로 전속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오는 4월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참여 작가로 초청됐다. 구순에 찾아온 ‘전성기’다.

김윤신은 최근 나무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회화조각’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회화조각’ 역시 자연과 하나되던 경험에서 비롯했다. “어린시절 크레파스 같은 게 없으니까 물감을 촛물에 넣어 나무에 칠하고 놀았어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외부에 나갈 수 없어 재료를 구할 수 없었을 때 나무조각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자 어린 시절 나무에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생각났죠. 어렸을 때 혼자서 놀면 밤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아요. 별들도, 나무도, 꽃도, 흙도 다 내 친구예요. 자연은 다 내 친구예요. 세상 모든 게 나의 친구죠. 그런 경험에서 솟아나온 것이 오늘날 내 작품으로 변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윤신은 최근 40년 만에 한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완전한 이주는 아니다. 여름이 오면 아르헨티나로 가 4개월 정도 머물며 작업하며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오갈 예정이다. 그는 40년간 아르헨티나에 머물렀던 것도 ‘멈춤’ ‘(발)묶임’이라고 표현했다. 이번엔 다시 한국에서 ‘멈추’게 됐다. 정주를 거부하고 끝없이 유랑하는 ‘노마드’로서 살아온 삶, 그 중심에는 쉼 없이 매진해온 김윤신의 예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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