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남자’가 페미니스트에게 털어놓은 진심

이영경 기자
‘성난 백인 남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클라호마에서 열린 전미대학체육협회의 레슬링 경기 시합을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성난 백인 남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클라호마에서 열린 전미대학체육협회의 레슬링 경기 시합을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스티프트

수전 팔루디 지음|손희정 옮김|아르떼|1144쪽|7만원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는 1990년대 미국 사회의 신보수주의 흐름 속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을 가해진 반동적인 공격 현상인 ‘백래시(Backlash)’를 조명한 역작이다. 사반세기가 지나서야 한국에 소개됐지만,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 또한 거세지던 한국 상황과 맞아떨어지며 화제작이 됐다.

팔루디가 <백래시>에 이어 1999년 펴낸 <스티프트>는 ‘성난 남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6년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며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들을 인터뷰한 방대한 르포르타주다. <백래시>와 마찬가지로 사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 도착한 <스티프트> 역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긴밀하게 조응한다. 숏컷을 했다는 이유로만으로 폭행당하는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범죄가 증가하는 현실은 ‘성난 남성들’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도 위험한 균열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팔루디는 가정폭력 가해자 자조 모임에 참관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남자들이 여성의 저항에 위기감을 느끼고 지배력과 통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참가자들은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여성을 구타할 당시엔 ‘남자답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권력감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남자도 아니라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해자들은 무력함, 통제 불능, ‘나는 남자도 아니라는 기분’에 시달렸지만 이런 얘기를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 데는 없었다. 대신 분노를 여성·흑인·이주민·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로 돌렸다. 팔루디는 질문을 바꾸기로 한다. “‘남자들은 어째서 여자들이 더 자유롭고 건강한 삶을 위해 투쟁하는 것에 반대하는가’를 질문하는 대신, ‘남자들은 어째서 그들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팔루디가 만난 남자들은 광범위하다. 전후 대대적 구조조정을 진행한 군수공장의 이직 지원 사무소에 이력서를 보내고 있는 해고자들, 과격한 ‘남성단체’ 모임에 참석해 설교를 듣는 남자들, 베트남전에 참전했거나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남자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있던 액션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과 변두리의 포르노 배우들을 만난다. 남자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좌절감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성, 심지어 페미니스트에게!

이들은 공통적으로 배신(stiffed)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평범한 보병으로, 군수산업의 호황 속에 생산직에 종사하면서 사회적 쓸모를 인정받던 ‘평범한 남성’들은 전후에 더 이상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졌다. 팔루디는 “남자들을 배신한 것은 다름 아닌 전후 미국 사회의 가부장주의적 자본주의”라고 지적한다.

미국에선 출간과 함께 호평이 쏟아졌다.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정곡을 찌른다”고 평했다. 미국적 상황에 기반한 책이지만,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난 백인 남성들’ 자리에 ‘이대남’을 대입시켜도 큰 이질감이 없다. 끈질기고 진심 어린 태도로 ‘성난 남성’들의 이야기게 귀 기울인 팔루디는 이들의 처한 문제의 해답이 페미니즘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페미니즘과 만나는 길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책과 삶] ‘성난 남자’가 페미니스트에게 털어놓은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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