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뺄 것 없는 단순함, 동서양이 통했다

이로사 기자

학고재갤러리 ‘디자인의 덕목’전

솥뚜껑만한 조선 시대의 소반 몇 개가 벽에 걸려있다. 나무를 깎고 엮거나, 종이를 붙여 손으로 만든 전통 소반은 불균질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 옆엔 프랑스의 디자이너 마르탱 세클리의 붉은 테이블이 놓였다. 현대의 세공기술로 완성된 철제 알루미늄 테이블은 차갑고 완벽하다. 그러나 동서양의 테이블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원형의 정수리가 보이도록 전시된 전통 소반은 중국 작가 천원지의 회화 작품과도 조응한다. 얼핏 설치 작품처럼 보이는 이 회화는 파란 원이 6개, 각 원은 서로 다른 숨을 쉬고 있다. 전통 소반의 울퉁불퉁한 원, 마르탱 세클리의 붉은 원, 천원지의 서로 다른 6개의 파란 원은 단순함의 경지에서 서로 만난다.

29일부터 오는 3월20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디자인의 덕목’전이 열린다. 한국 전통 고가구와 현대 디자인 가구, 단색의 회화 작품 등 20여점이 전시된다.

파란 원들은 천원지의 회화 ‘Breath in, Breath out’(2007), 멀리 조선시대 소반들이 걸려있다. | 학고재 갤러리 제공

파란 원들은 천원지의 회화 ‘Breath in, Breath out’(2007), 멀리 조선시대 소반들이 걸려있다. | 학고재 갤러리 제공

전통고가구 강화반닫이, 고미술품인 책가도, 추사의 판전 현판 탁본과 유럽 출신 디자이너 헬라 용에리 위스, 로낭과 에르완 부훌렉, 피에르 샤르팽, 제임스 얼바인 등의 가구와 조명, 그리고 이우환, 정상화, 프랑수와 모렐레, 천원지의 모노크롬 회화가 어우러졌다.

학고재 갤러리는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가구는 우리 조상들과 유럽 디자이너들이 기능을 충족시키는 범위 내에서 디자인한 가구들”이라며 “시공을 초월해 디자인이 갖춰야 하는 기본과 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전시된 작품들은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기교를 최소화해 대상의 본질을 드러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봉은사 판전 현판의 탁본으로, 그가 생을 마감한 1856년에 쓰여졌다. 이 글씨를 쓴 3일 후 추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글씨에선 젊었을 적 추사의 화려한 기교를 볼 수 없다. 굵은 필획으로 완성한 단순한 글씨다. 일생 연구한 화려한 필체를 체화한 뒤 그는 기본으로 돌아갔다. 추사의 글씨는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샤르팽의 수납장 가까이에 전시되어 있다.

붉은 테이블은 마르탱 세클리의 ‘M.G.D’(2002). | 학고재 갤러리 제공

붉은 테이블은 마르탱 세클리의 ‘M.G.D’(2002). | 학고재 갤러리 제공

책가도(冊架圖)와 제임스 얼바인의 책장은 흥미로운 쌍이다.

책가도는 책과 서가, 방 안의 기물들을 함께 그린 조선 시대의 민화를 말한다. 주로 선비의 사랑방을 장식하는 그림이었다. 옆에 서 있는 영국 디자이너 제임스 얼바인의 책장은 책장의 각 선반을 조금씩 옆으로 위로 밀어 놓은 듯한데, 최소한의 변화로 비례와 변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책장은 어딘지 모르게 책가도 속의 어지럽지만 조화로운 서가와 닮아 있다.

깊고 정적인 이우환의 회화 역시 아이로니컬하게도 기능을 충족시키는 현대 디자인 가구들과 잘 어울린다. 세 개의 점으로 이뤄진 이우환의 그림은 세 개의 완두콩 모양 등이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로낭과 에르완 부훌렉의 조명과 한 시야에 들어온다.

반닫이 중에서도 가장 희귀해 고가에 속하는 강화반닫이도 전시된다. 강화반닫이는 강화지역에서 제작된 반닫이를 말하는데, 과거 왕실용 반닫이를 주로 이곳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구조가 특이하고 문양이 화려하다. 강화반닫이는 특히 다른 반닫이들과 비례가 다르다. 키가 높아 더 안정적이고 신선한 느낌이 든다.

이밖에 마술상자처럼 나뉘는 스웨덴의 산업 디자인팀 프런트 디자인의 ‘디바이디드 사이드보드 #2’ 서랍장,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헬라 용에리위스의 공예적인 조명 ‘비드 벌브’ 등 유럽 젊은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가구들도 눈길을 끈다.

한옥인 갤러리의 서까래 역시 전시된 작품들과 효과적으로 상응한다. 문의 (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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