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역사저술가 박천홍

김희연·사진 김정근 기자

자기만의 문제의식 가지면 역사 속 글감은 무궁무진

“8부 능선은 넘었지만….” 역사저술가 박천홍씨(47)는 말끝을 흐렸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2008년) 출간 이후 5년여의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새 저서가 언제쯤 나올지 궁금해하자 그는 이제 막 8부 능선을 넘어섰다고 했다. 숨이 턱에까지 차올랐고 정상이 눈앞에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등정이 남아있다. 그는 2003년 철도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문명을 다룬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을 내놓으며 단박에 주목받았다. <여행하며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 총 5권(2004년), <인간 이순신 평전>(2005년)을 냈고 근대 지식의 형성사를 담아낼 <활자와 근대>를 현재 집필 중이다. 올 하반기 이 책이 나오면 ‘근대 3부작’이 완결되는 셈이다.

재단법인 아단문고의 학예연구실장인 그는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했지만 역사학자는 아니다. 전업 저술가도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칭했다. 역사학자가 아닌 덕분에 밑바닥 민중들의 삶에까지 눈길을 뻗을 수 있었고, 근대 문인의 작품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을 읽었으며, 새로운 문명과 맞닥뜨린 사람들의 혼란과 환희까지 촘촘한 그물망으로 포착해 근대의 또 다른 모습을 잡아낼 수 있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 대해 ‘진입 장벽이 높다’고 얘기하는 것과 달리 그는 “역사저술가가 되는 길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고 진입 장벽이 낮으며 사료가 널려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역사저술가가 되기 위해, 또는 역사저술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뉴 파워라이터](17) 역사저술가 박천홍

■ ‘근대’ 살피면 ‘현재’ 모습 들여다볼 수 있어

-‘아단문고’에서 무슨 일을 하나.

“아단문고는 고려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생산됐던 고문헌, 신문·잡지, 단행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자료를 관리하고 전시 기획, 잡다한 행정업무까지 맡아서한다. 상설전시공간이 있는데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소장품 가운데 특히 가치 높은 근현대 잡지가 많다. 문인들이 기증한 육필원고까지 합치면 소장품이 9만여점 된다.”

-‘자료의 보고’에 살고 있으면서 공백이 너무 길다.

“(웃음)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일하는 틈틈이, 일하지 않는 시간을 쪼개야 한다. 게으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서의 주제 자체가 감당하기 버거운 것 같다. 여전히 출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는 한국만 보려고 했는데 중국, 일본으로 확대됐고 서양으로까지 넘어갔다.”

-집필 중인 <활자와 근대> 얘기인가.

“인쇄매체가 도입된 후 근대 지식체계와 서구식 관념이 우리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들여다보려는데 쉽지 않다. 근대 인쇄출판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한국 근대 지식의 형성사를 그리려고 한다. 조선에 박문국이 설립되고 한성순보·주보가 출간되는 등 언론사로 접근한 책들은 부분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종합적인 역사서로 이 시대 활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 지식인, 지식체계를 담기는 처음이다.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까지 동아시아 3국의 근대적 지식 체계가 성립된 기원과 그들이 문자와 기록, 지식을 통해 무엇을 상상하고 꿈꿨는지 살펴볼 것이다.”

-근대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뭔가.

“역사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현재의 모습이 왜 이럴까, 어떤 모습일까,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봐야 한다. 500년 전, 1000년 전의 먼 역사는 몰라도 멀지 않았던 근대 초기야말로 현재 우리의 유전자에 바로 새겨져있는 때이다. 근대는 특히 낯선 사람과 문명, 지식체계와 정면으로 만난 시기다. 새로운 것들과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고 대화했는지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100~200년 전의 역사를 카메라로 방금 찍은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다는 평이다.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을 낸 후 문학계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다. 철도가 주요한 배경이 되거나 주제가 됐던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을 적극 활용했다. 문학 작품이 역사에도 유효하게 쓰인다는 점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역사학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사료는 한계가 많다. 정부의 공식적인 자료 등 정통적인 사료는 이야기의 골격만 있을 뿐 살점이 없다.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자료에서 찾아내는 일상의 풍경, 그 역사가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다.”

-역사저술가가 꿈이었나.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역사의 재미를 몰랐다. 잡지사(‘출판저널’) 생활을 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글을 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2003년 출판사 운영주체가 바뀌면서 갑자기 실직자가 됐다. 백수기간에 집중해 첫 저서를 썼다. 일기를 써본 적도 없고 잡지사에 들어가 처음 글을 쓰는데 기본이 안돼있다고 엄청나게 구박받았다. 지금도 물 흘러가듯 잘 쓰는 스타일이 아니다. 뒤틀고 쥐어짜는 식이다. 반성도 하지만 나만의 스타일인 것 같다.”

[뉴 파워라이터](17) 역사저술가 박천홍

■ 민중이 근대 주도권 잡았다면 많이 변했을 것

-낯선 문명, 낯선 타자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일까.

“한 개인이든 사회든 공동체이든 자기 안에 갇혀있으면 올바른 주체로 형성되기 힘들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만났을 때 정확히 내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다. 다른 존재와 만나 열려 있을 때 훨씬 더 풍부해진다. 갇혀 있을수록 빈곤해진다. 그런 점에서 근대는 획일화되고 독단적인 지식체계를 깨나가는 시기였고 열려 있는 사회로 나아가려던 때였다. 식민시기로 접어들면서 모든 게 어그러졌지만 모든 가능성이 가장 펼쳐진 시대였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결국 정치인, 관료들의 문제다. 일본이든 서양이든 새로운 주체와 의식들, 변화와 만났을 때 왜 유연하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지식으로 위장하지 않았고 권력으로 유지할 기득권이 없었던 민중은 더 유연했다. 이들이 근대 주도권을 잡았다면 우리 모습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자료는 그 다음에 찾으면 된다. 자료가 또 다른 자료를 찾게 만들고 스스로 길을 안내해준다. 질문을 제대로 해야 제대로 된 답을 얻듯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자기 눈에 들어오는 자료가 발견되고 이야기가 쓰인다. 역사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영역이다. 전문 역사학자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

-구상 중인 책은.

“매천 황현(1855~1910)과 1890년대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했던 지리학자 겸 여행작가였던 영국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본 근대가 될 것이다. 전남 광양 시골에 살았던 한국인 성리학자 남자와 서양인이면서 지리학자 겸 여행작가인 여성이 바라본 근대의 모습, 두 시선을 교차해가며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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