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년 동안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우리 집엔 화장실에도 늘 책이 있었다. 주로 아버지가 읽으시는 월간지나 단행본 같은 것들이었는데, 어느 날 무슨 연유에선지 소설 한 권이 내 손에 잡혔다. 거실로, 방으로 가져가며 읽었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었다. 인물들의 이름이 헷갈렸지만 좀 쉬었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다니고 엉덩이에 돼지꼬리가 달린 아기가 태어나고, 드디어 마콘도 마을의 100년이 허공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야기와 함께 숨 쉬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현실과 환상이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고등학생에게 그 책은 충격이었다.
책을 읽으면 이야기 속 인물에 매료돼 그 인물처럼 일상을 바꾸곤 했다. <좁은 문>을 읽고 나면 제롬처럼 생각하고, <제인 에어>를 읽고 나면 제인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결국 소설가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좌절했다. 현실과 직설을 이야기하는 캠퍼스에서 허구의 세계에 경도돼 있던 나는 어쩔 바를 몰랐다. 얄팍하고 안일한 내 성향, 진득하지 못한 기질, 무엇보다 매력적인 문장을 뽑아내지 못하는 글재주를 깨닫고 포기했다.
작년에 콜롬비아 보고타에 공연을 하러 갔다. 곳곳에 ‘가보’(마르케스의 애칭)의 사진과 이름을 새긴 건물들이 있었다. 마르케스에 대한 콜롬비아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리고 콜롬비아에 머무는 동안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4월16일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영상을 보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장되리라고 믿지 않았지만, 그 환상은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마치 마콘도 마을의 문짝과 창문과 지붕과 집의 뿌리가 뽑히는 장면처럼. 그리고 다음날, 마르케스의 사망 소식으로 보고타는 떠들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