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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 천상병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대표적 시다. 그는 이 세상의 삶을 소풍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을 하늘로 이미지화하였다. 천상병 시인의 삶을 생각하면 누구나 동정과 연민이 일어난다. 천재 시인이었지만 동백림사건으로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행려병자가 되어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술에 찌들어 불우한 삶을 살았다.그러나 그는 술에 취할수록 천재적 순수 서정시를 쓰며 세상 너머의 푸른 본향, 삶의 원형(archetype)을 사모하였다. 신화학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빼앗긴 에덴동산을 원형이라고 한다. 조지프 캠벨이나 밀턴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원형을 그리워하고 본향을 사모한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원형에 대한 향수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원형을 사모한 사람이다. 비극적 삶과 순수 감성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귀천’이라는 시를 쓰게 된 것이다.‘귀천’은 목회자인 나에게 성경에 버금갈 정도의 명시다. 나는 술과 관계없고, 천 시인과 같... -
(5)사기 | 사마천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아마도 압축된 희로애락에서 재미나 공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극적인 삶을 산다는 사람이 한둘씩은 있을 법도 하고. 하지만 인류역사상 인간 드라마를 집대성한 기록으로 만 한 게 있을까. 는 중국의 전설적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까지 2000여년의 역사를 130편(52만6500자)에 담은 방대한 기록물이다. 빼어난 역사서인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긴 탁월한 문학서다. 유태인에게 가 있다면 중국인에게는 가 있다.저자 사마천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지만, 역사서를 쓰라는 선친의 유언을 이행하기 위해 치욕적인 궁형을 감수하고 20년에 걸쳐 이 엄청난 역작을 완성했다.경제인으로서 내가 제일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은 사마천식 경제평론에 해당하는 ‘화식열전(貨殖列傳)’이다. ‘화식열전’은 “입고 먹는 것이 나라 다스림의 근원”이고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며 ‘재산(貨)을 불리는(殖)’ 일의... -
(4)돈키호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사내. 이름만으로도 저항과 광기(狂氣), 혹은 무모함의 상징이 된 돈키호테.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각색한 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고.그런 사람을 본 지 언제인가? 이룰 수 있는 꿈만 꾸고, 이길 수 있는 적하고만 싸우는 건 아닌지.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에는 “가장 미친 것이 가장 정상이다(Much madness is divinest sense)”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성만이 앞서는 세상. 그래서 너무 풀이 죽어 있는 세상이다. 옆나라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보면서, 또는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라는 말이 회자되는 세태에서, 돈키호테는 ‘꿈 없이 현실만 보는 게 더 미친 짓’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세르반테스는 독재와 검열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돈키호... -
(3)다양성·관용, 미래 강국의 조건
▲ 제국의 미래 | 에이미 추아강대국 혹은 지배적 문명의 성공과 쇠퇴를 분석한 책들은 역사적으로도 많다. E.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부터 20세기 후반에 나온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 등. 최근에 아주 흥미롭게 읽은 강대국 흥망사는 ‘타이거맘’으로 알려진 에이미 추아(Amy Chua) 예일대 법대 교수가 쓴 <제국의 미래>다. 두껍지만 재미있다.추아 교수는 역사상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초강국의 공통점이 ‘동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방대한 참고문헌을 토대로 한 이 책에서 추아 교수는 초강국들이 불관용으로 돌아서고 종교적·인종적·민족적 ‘순수성’을 부르짖는 순간부터 쇠퇴로 접어들었다고 설파한다. 잔혹한 정복자로 알려진 칭기즈칸도 이민족 출신들을 몽골제국을 경영하는 고위관리와 기술자, 군대 등으로 활용했다. 칭기즈칸의 자손인 쿠... -
(2)스티브 잡스 - 윌터 아이작슨
IT산업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인물을 든다면 첫손에 꼽힐 사람이 스티브 잡스일 것이다. 독창성과 탁월한 상상력에 열정을 더해 혁신의 아이콘이 된 기업가. 그의 전기 는 성공한 경영자를 넘어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이 원한 대로 세상을 바꾼 현대판 영웅의 전기에 가깝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잡스는 고귀한 품성이나 인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변 사람에게조차 때로 잔인하고 의리도 없는 데다 완벽주의자이면서도 거짓말을 자주 해 ‘현실왜곡장’이라는 조롱도 받는다.그럼에도 전자공학과 미학을 교차시키려던 그의 고집은, 오늘날 전 세계 제조업체들이 기술과 디자인의 융합에 매달리도록 자극한 출발점이 됐다. 신제품을 낼 때 대중적 기대와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마케팅과 프레젠테이션 등 그가 IT업계와 산업 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무엇보다도 내 등을 쭈뼛하게 만들었던 대목은 ‘우주에 흔적을 남기자’는 그의 말이었다. 매... -
(1)실패와 도전에서 배운 삶의 가치
▲ 갈매기의 꿈 | 리처드 바크정치 경제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대학가를 짓누르고 있던 1973년, <갈매기의 꿈>이라는 얇은 책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학교 앞 책방에서 한 권을 사서 그날 바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먹이 때문에’ 해변과 바다 사이를 왕복 비행만 하는 다른 갈매기들과 달리, 높이 날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한다. 그는 매번 실패하고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되며 결국 무리에서 쫓겨난다.하지만 유배지인 ‘먼 벼랑’에서 새 친구들과 스승을 만나 각종 비행방법을 익히고 원하는 대로 날게 된다. 최고의 비행실력을 갖게 된 조나단 리빙스턴은 자기를 추방한 무리에 돌아와 자유롭게 나는 법을 가르치고 떠난다.유배지에서 조나단 리빙스턴은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방황하던 대학 시절, 이 말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사는 삶의 가치... -
(5) 대화 - 진실을 나누는 것이 용기다
▲ 대화 | 리영희공연 보러온 후배 손에 들려있던 것인데 빌렸다가 그대로 가진 책이다. 왠지 이 책을 붙들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릴 땐 그냥 살아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용기라는 게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하는 그런 것일 때가 많다. 이 쉬운 일이 어떨 땐 전혀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인 것 같다.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대화>에는 매 순간, 줄기차게, “검은 것은 검고 흰 것은 희며, 사슴은 말이 아니라 사슴이고, 말은 사슴이 아니고 말”이라고 말해온 선생의 인생 이야기가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언론인으로서, 실천하는 지성으로서 살아온 선생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참상과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 -
(4) 입속의 검은 잎 - 죽음은 우리 목덜미에…
▲ 입속의 검은 잎 | 기형도(기형도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이 땅의 날씨가 나빴던 1989년 이른 봄에 추리소설의 마지막 장면 같은 죽음이 있었다.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을 거둔 기형도 시인. 그리고 그해 봄이 끝나갈 무렵,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세상에 나왔다.시집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이 시집을 읽었던 것 같다. 날씨가 나쁜 시대, 그 날씨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꽤나 무딘 인간이라 한쪽 눈만 뜨고서 그 날씨에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몸이든 생각이든 무뎌진 상태로 살다 보면 그대로 굳어진 삶을 살게 된다.지금도 이 시집을 읽으면 내 굳은살이 도려내지는 느낌을 받는다. 너무나 예리한 언어가 나를 베는 것 같은 찌릿하고 무거운 통증을 느낀다. 이 시집에는 조용히 다문 입과 소리 없는 눈물 그리고 죽음이 있다.연극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
(3) 가난한 연극 - 어떤 연극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되다
▲ 가난한 연극 | 예지 그로토프스키문학에 대한 섣부른 좌절은 나를 다른 것에 몰두하게 했다. 대학 시절, 나는 연극 동아리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 시절 학교 앞에 동아리 선배가 운영하던 카페가 있었다. 차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책을 봐도 주인이 관심을 주지 않는 곳이었는데, 벽마다 한 남자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반라인 모습은 순교자의 마지막 같은 인상을 풍겼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무아지경의 눈과 몸짓이 날 끌어당겼다.카페 주인인 선배가 어느 날 <가난한 연극>이라는 책을 보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이 가난하다는 생각은 놀랄 것이 없었기에, 제목만으로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책을 사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카페에서 봤던 그 사진 속 남자가 있었다. 리샤르트 치에슬락, 폴란드 <연극실험실>의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의 페르소나였다!<가난한 연... -
(2) 백년 동안의 고독 -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지다
▲ 백년 동안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우리 집엔 화장실에도 늘 책이 있었다. 주로 아버지가 읽으시는 월간지나 단행본 같은 것들이었는데, 어느 날 무슨 연유에선지 소설 한 권이 내 손에 잡혔다. 거실로, 방으로 가져가며 읽었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었다. 인물들의 이름이 헷갈렸지만 좀 쉬었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다니고 엉덩이에 돼지꼬리가 달린 아기가 태어나고, 드디어 마콘도 마을의 100년이 허공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야기와 함께 숨 쉬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현실과 환상이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고등학생에게 그 책은 충격이었다.책을 읽으면 이야기 속 인물에 매료돼 그 인물처럼 일상을 바꾸곤 했다. <좁은 문>을 읽고 나면 제롬처럼 생각하고, <제인 에어>를 읽고 나면 제인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