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사 대중화'의 길 함께 걷는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와 고려사 연구자 이승한

김유진 기자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푸른역사 사무실에서 <고려 무인 이야기>에 이어 <몽골 제국과 고려>를 완간한 저자 이승한 교사(오른쪽)와 박혜숙 대표(왼쪽)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 대표는 저자의 글에 대해 “사료 하나를 대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서술 방식이 강의와 비슷하다”며 “유장미가 살아있다”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푸른역사 사무실에서 <고려 무인 이야기>에 이어 <몽골 제국과 고려>를 완간한 저자 이승한 교사(오른쪽)와 박혜숙 대표(왼쪽)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 대표는 저자의 글에 대해 “사료 하나를 대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서술 방식이 강의와 비슷하다”며 “유장미가 살아있다”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17년,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세월 동안 모두 8권의 책을 함께 펴냈다. 미처 말하지 못한 우여곡절이 한 움큼 되지는 않을까. 최근 ‘몽골 제국과 고려’의 마지막 권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를 펴낸 저자 이승한 교사(62)는 “과제를 푼다는 느낌이 전혀 없이 즐겁게 썼다”고 했다. 1996년 역사전문 출판사 푸른역사를 세울 당시부터 기획·편집 실무를 병행해 온 박혜숙 대표(57)도 “가장 편하게 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서촌 인근의 푸른역사 사무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혹시 알아보지 못하면 어쩔까 염려했다”(박혜숙), “그때는 강골처럼 보였는데 조금 야위신 것 같다”(이승한)는 인사말부터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이번 경향신문 인터뷰를 통해 18년 만에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긴 시간 글을 매개로 소통해 온 인연의 힘일까. 인터뷰는 저녁 자리로 옮겨서까지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각 4권으로 구성된 <고려 무인 이야기>와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는 역사 대중서 시장은 물론 학계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된 고려사 분야에서 돋보이는 저작이다. 박혜숙은 “조선사에 비해 사료의 양도 얼마 되지 않은 분야에서 방대한 분량의 책이 나왔다. 고려시대 정치사·제도사는 거의 다 정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달 말 광주광역시의 고교 교사로 정년 퇴임하는 이승한은 대학원(전남대)에서 고려사를 전공했다. 전교조 해직 교사로 삼별초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그는 1994년 말 복직 결정이 나자 ‘생업’에 충실하는 길을 택했다. 이승한은 “막상 논문을 포기하니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길게 쓰게 된 것 같다”고 머쓱해했다.

최근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를 펴내며 고려사 대장정을 마무리한 저자 이승한은 이달말 정년퇴임을 앞둔 현직교사다. 권도현 기자

최근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를 펴내며 고려사 대장정을 마무리한 저자 이승한은 이달말 정년퇴임을 앞둔 현직교사다. 권도현 기자

<고려 무인 이야기> 1권이 출간된 것이 2001년. 6년간 출판 콘텐츠 관련 일을 하던 박혜숙이 ‘역사 대중화’를 기치로 설립한 푸른역사를 의욕적으로 이끌던 시점이다. “요즘은 다들 대중적 글쓰기를 표방하지만 그때만 해도 학계의 벽이 상당히 높았어요. 젊은 역사학자들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죠.” 이메일 투고로 들어 온 이승한의 원고는 그래서 반가웠다. 고려사를 <로마인 이야기>처럼 풀어보겠다는 ‘무명’ 저자의 포부에 편집자의 ‘감’을 걸어보기로 했다. 박혜숙은 “사람에 대한 평이 독특하다고 느꼈다”며 “사람 냄새 나는 역사책을 지향한다는 게 곳곳에서 보였다”고 말했다.

고려사를 보는 저자의 시각이 책 전반에서 묻어나온다. 고려 중기 무신 정권 100년사와 80여년의 원 간섭기를 역사학계의 통념에 갇히지 않고 입체적으로 서술했다. “몽골 지배 시기를 암울했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민중의 관점에서는 매우 역동적·개방적이었고, 세계화 시대에 세계시민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민족주의 시각에서는 고려 왕조를 배신한 매국노일 수 있겠지만, 개개인에게는 엄청난 사회진출의 계기를 만들어줬지요.”

그동안 출판사 측은 후속작 출간 시기를 묻는 독자들의 전화나 이메일을 적잖이 받았다. 저자가 방학 때마다 칩거하다시피 하며 집필에 몰두했지만 거의 2~3년에 한 권꼴로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절판 상태인 <고려 무인 이야기>의 경우,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승한은 “집구석에서 책만 쓰니 아내가 싫어했다”며 “스무번 이상은 고쳐 쓴 것 같다”고 했다. 박혜숙은 “독자들이 고려사에 대한 재미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지 않았을까”라며 “고대사 영역에서도 이런 필자가 나와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유사역사학’ 동네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 권도현 기자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 권도현 기자

책의 맺음말에서 저자는 “푸른역사의 행운과 건승을 빈다”고 적었다. “지방에 있고 이름난 연구자도 아닌 자신을 붙들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박혜숙은 “그 문장을 보는데 뭉클했다”고 말했다. 20여년 전문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대장부’ 출판인의 눈빛이 이내 촉촉해졌다. 초창기부터 “틈새 주제를 잡아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 온 그는 <미쳐야 미친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 여러 히트작을 냈지만 오히려 회사를 키우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작은 출판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 이상을 하게 되면 시장의 논리에 끌려다니고, 경영을 고민하느라 편집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껏 420여종의 책을 내면서 쉴 새 없이 달려온 박혜숙에게 편집은 “필자 인생에서 책 집필이 갖는 의미를 공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때는 뭣 모르고 저자를 쪼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저 교정만 하는 게 아니라 저자를 믿고 지켜봐주는 것이야말로 편집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출판 시장의 위축을 대하는 태도도 의연하다. 한때 최소 3000명은 됐던 역사 분야 충성 독자층이 이제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보니 우울하기도 했다”며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할 바에야 내가 흐름을 만들어가자고 생각을 바꿨다”고 말했다. “22년간 출판사를 하면서 영광도 누려보고 돈도 벌었으니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는 그는 ‘이 말을 꼭 적어달라’며 “출판계 원로라는 분들이 사회 환원도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직 생활을 마감하는 이승한에게는 어쩌면 지금부터가 저술가로서 활동의 나래를 펼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노안이 와서 예전처럼 글을 보기가 힘들다”는 그에게 박혜숙이 슬그머니 아이디어를 던졌다. “우선 <고려 무인 이야기> 개정판부터 내볼까요. 운주사나 삼별초에 관한 장은 얇은 단행본으로 내도 괜찮을 만한 보물이에요. 강의도 하시고 평전을 써 보셔도 좋겠는데…”라는 그의 말에 이승한이 “반응이 좋았던 두 가지 주제를 딱 짚으셨다”고 반색했다. “무엇이든 길게 보는 힘”을 알려주는 역사에 푹 빠진 저자와 편집자가 앞으로도 “박제된 역사에서 서사를 부활시키는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만 같다.

푸른역사에서 펴낸 <몽골 제국과 고려>(전4권). 1권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2권 <혼혈 왕 충선왕,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3권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 4권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로 구성됐다.

푸른역사에서 펴낸 <몽골 제국과 고려>(전4권). 1권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2권 <혼혈 왕 충선왕,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3권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 4권 <몽골 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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