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정치철학자 김만권과 소은주 여문책 대표

김유진 기자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출간한 정치철학자 김만권 박사(왼쪽)와 여문책 출판사 소은주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출간한 정치철학자 김만권 박사(왼쪽)와 여문책 출판사 소은주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빈 손’, ‘빈 주먹’으로 만난 사이라고 했다. 대중 저술과 강연을 통해 정치사상을 알리는 ‘강단 밖’ 학자나, 책을 내는 전 과정을 온전히 혼자서 책임지는 ‘1인 출판사’ 대표나 처지가 비슷하다는 뜻이었을까.

이달초 서울 안국동에서 만난 정치철학자 김만권(47)과 소은주 여문책 대표(50) 사이에는 유독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최근 2016년 <호모 저스티스> 이후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펴냈다. 다소 도발적이라고 할 제목이 말해주듯이, ‘노동 밖’에서 분배를 고민하는 시도로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을 검토한다.

책은 매년 한 두차례 시민단체 등에서 무료강연을 진행해 온 김만권이 지난 7월말 참여연대에서 했던 강연을 토대로 한다. 김만권은 “산업사회와 달리 지금의 탈산업사회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분배가 가장 절실한 사람들을 정당한 분배 밖으로 내모는 것이 문제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은 인공지능(AI) 기술 발달에 따른 일자리 소멸 우려와 맞물려 지구적 의제로 급부상했고, 국내에서도 서울시나 성남시의 ‘청년배당’이나 녹색당 등이 들고 나오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기초자본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지만, 지난 3월 정의당 심상정 의원실은 상속·증여세 재원을 활용해 20세가 된 청년 모두에게 1000만원씩 지급하는 ‘청년사회상속법’을 발의한 바 있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개인에게 조건없이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모두를 위한 소득’, 성년에 이른 모든 시민들에게 인생 출발선상의 평등을 보장할 목적으로 목돈을 제공하는 기초자본은 ‘모두를 위한 상속’에 해당한다.

김만권은 “재정 부담을 고려할 때 기본소득보다는 기초자본이 실현 가능성 높다고 생각한다”면서도 “1000만원으로 청년들의 삶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2만9700달러) 수준인 최소 3000만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소은주는 “책을 통해 기본소득과 기초자본 논의를 위한 공론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영업자’이자 23세 아들을 둔 엄마로서 기본소득·기초자본이 ‘자기 문제’로 와닿았다는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아이가 없더라도 조카나 이웃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를 위한 정책이다”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의 정치철학적 근거를 접해온 김만권은 이론과 역사적 배경, 한국 등지의 사례를 바탕으로 “가능한 한 쉽게” 책을 쓰려고 노력했다. 강의부터 책 출간까지는 석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김만권이 분배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한 지자체 축제 담당자가 그를 ‘저자와의 대화’에 초청하는 바람에 무조건 일정을 맞춰야 했다. “111년만의 폭염”에 서로 지칠 때마다 소은주는 “원래 번갯불에 구워먹는 콩이 정말 맛있는 것”이라며 다독였다.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누나와 같이 일하는 기분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그는 “저자를 절대 나이로 평가하지 않지만 마침 막내 동생하고 동갑이어서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번 책이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둘은 5년 전쯤 4권의 책을 함께 내기로 ‘계약’을 맺은 상태다. 정의·자유·권력의 계보학을 다루는 ‘계보학 시리즈’ 3권, 그리고 편집자가 평소 관심있던 분배에 관한 책 1권. 과거와 현대를 가로지르며 정의의 역사를 훑은 <호모 저스티스>와 새로운 분배 모델을 탐색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냈으니, 반환점을 돈 셈이다.

저자가 뉴욕 뉴스쿨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무렵, 소은주는 1인 출판사 여문책을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국내 굴지의 인문사회 출판사 편집자로 있다가 건강 문제로 사직한 그는 몇 개월 만에 “출판이 팔자구나”하고 깨달았다. 역사학자 주명철이 ‘프랑스 혁명 10부작’ 원고를 맡긴 것도 계기가 됐다. 이메일로 책 작업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대면한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김만권은 “한 권도 아니고 내 공부 플랜을 믿고 여러 권을 내겠다고 하며 신뢰를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파워라이터’의 책 다수를 편집했던 소은주는 대중 저술가로서 김만권의 가능성을 높이봤다. 소은주는 “꾸준히 책을 내는 정치철학자가 드문 현실에서 보석같은 존재”라며 “마이클 샌델처럼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스테디셀러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길에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강의와 팟캐스트 등으로 다져진 저자의 언변을 언급하며 “말과 글 모두 잘 되는 저자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문학청년으로 한 때 시인을 꿈꿨던 김만권은 대학원(연세대)에서 정치사상을 공부하면서 그만의 ‘재능’을 발견했다. 남들이 어렵다는 책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이 좋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쉽게 풀어서 들려주면 좋겠다”는 열망까지 생겼다. ‘교수직’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하지만 학기 중에는 생계를 위해 대학 영어강의 등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철학은 시대의 고민과 떨어져 있지 않다”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괜찮다’는 말보다 괜찮은 시스템과 제도를 만드는 게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회 시스템이 인간 존중 문화를 보여주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줄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펴내자마자 김만권은 두 권의 책을 추가로 쓰기로 약속했다. 인권에 관한 입문서, 그리고 ‘외로워진다는 것’의 정치적 의미를 묻는 책이 그것이다. 후자에서는 전체주의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관점을 빌려와, 20세기 들어 나타난 인간의 집단적 외로움과 그로 인한 사회·정치적 변화를 사유할 계획이란다. 두 사람이 함께 책을 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어쩌면 “‘이름값’ 좀 해라”는 편집자의 농담(인문사회서는 1만부만 넘겨도 ‘베스트셀러’로 간주된다)이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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