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있으라?…‘언더 더 씨’의 세월호 애도는 실패했다

위근우|칼럼니스트

강동수의 소설 ‘언더 더 씨’ 논란과 애도의 윤리

인칭대명사의 선택은 윤리의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일련의 국가적 사건 사고에서 3인칭 화법을 쓰며 본인의 책임을 회피했다. 그와 반대로 하지만 비슷하게, 최근 소설가 강동수의 소설집 <언더 더 씨>에 실린 동명의 소설이자 세월호 희생자 여학생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언더 더 씨’는 도입부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이란 문구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그것도 세월호 희생자의 입을 빌려 묘사했다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적확한 비판이었다. 작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 문장 하나로 온갖 욕설이 쏟아지고 있”다고 억울해했지만 당장 같은 소설집에 실린 ‘알록달록 빛나는’에서도 10대 여성 화자는 조건 만남 사기를 치며 “사내의 손이 서슴없이 내 젖가슴 위에 얹”히는 순간을 묘사한다. 작가가 특정 부위에 집착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1인칭 시점을 쓰는 것을 통해 타인을 재현할 권리를 쉽게 전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은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저 징그러운 문구를 눈 질끈 감고 넘어가거나 없는 셈 치더라도 이 작품집 전체에서 문제적으로 드러난다.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신항 앞 철조망은 시민들의 추모의 글이 적힌 노란 리본으로 채워졌다.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 시대 국민적 다짐과 같은 것이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신항 앞 철조망은 시민들의 추모의 글이 적힌 노란 리본으로 채워졌다.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 시대 국민적 다짐과 같은 것이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작가의 변처럼 ‘언더 더 씨’는 진혼굿의 모티브를 차용한 형식으로 1인칭 사용을 정당화한다. 여기서 작가는 말하자면 문학적 접신을 시도하는 샤먼이다. 샤먼은 말할 수 없는 망자의 억울함을 대신 말해주는 것을 통해 사회적 애도를 시도한다. 2014년 5월31일 인천 연안부두에서 열린 세월호 희생자 진혼굿에서도 만신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주시고 도와주세요”라고 학생들의 말을 전했다. 굿의 영험함을 믿지 않더라도 망자의 목소리로 살아있는 자들의 책무를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필요한 애도라 할 수 있다. ‘언더 더 씨’의 애도는 어떤가. 화자는 “우리를 여기 빠트려 놓고선 아직 건져내지도 못한 채 천연스럽게 밥을 먹고, 출근하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고, 여름휴가 땐 외국으로 나다니는 어른들의 죄”를 묻는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중산층의 사치에 대한 미움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딘가 작위적이다. “단식 농성하는 엄마, 아빠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아귀아귀 먹어댔다는 어떤 아저씨와 오빠들”에 대한 언급 역시 얄팍하다. 그거면 된 걸까. 샤먼으로서의 작가는 세월호에 대한 직간접적인 공통의 책임감 안에서 그 책임을 무겁고도 윤리적으로 지는 방식은 무엇일지 망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구하기보단, 모두가 다 아는 나쁜 놈들을 한 번 더 언급하고 빠르게 발을 뺀다. 그렇다면 의문이다. 형식적으로 진혼굿을 띤 이 소설에서, 희생자와의 문학적 접신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접신을 시도해 진혼굿을 벌이는 이 작가는 믿을 만한 샤먼인가. 스스로를 10대 여학생이라 칭하는 1인칭 화자의 말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어줄 수 있는가.

[위근우의 리플레이]‘조용히’ 있으라?…‘언더 더 씨’의 세월호 애도는 실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3인칭 화법 쓰며 책임 회피했는데
소설가 강동수는
1인칭 사용하며 자신의 결백 서술

침묵하는 망자의 목소리 빌려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 얘기하며
침묵하지 않는 산 자의 목소리는
‘극렬 페미니스트’로 몰아 배제
결국 ‘세월호 부채의식’은 기만적

인칭대명사 선택은 윤리의 문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인식은
세월호 이전에도 중요했고
그 이후엔 더 요구된 민감함이다

‘언더 더 씨’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따로 있다. 물에 떠다니는 화자 단비는 지상에서 만났던 사람을 회상하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사람만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버스에서 피곤해서 잠깐 졸았더니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우산 끝으로 종아리를 찌르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던 그 혈색 좋은 할아버지는 아직도 학생들만 보면 그러고 다닐까. 만원 지하철에서 내 엉덩이를 슬슬 만지던 양복장이 사십대 변태 아저씨도 떠오른다.” 조금은 뜬금없는 이 구절이 본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극렬 페미니즘 카페의 회원들과 서울신문이 문제로 삼아 나를 ‘개저씨’로 만든”(작가 페이스북) 것에 대한 작가의 억울함이 함께 다뤄져야 한다. 작가는 왜 ‘개저씨’라는 말에 분노하는가. 자신이 소설 속에서 “혈색 좋은 할아버지”와 “양복장이 변태 아저씨”로 언급한 ‘개저씨’들과 작가 본인이 구분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소설 문구는 실제 여성들이 겪는 폭력의 문제를 피해 당사자 입장에서 진지하게 다루며 소설가 본인을 비롯한 중년 남성의 지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가와 여타 ‘개저씨’를 구분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개저씨’가 어떤 놈들인지 안다, 고로 나는 ‘개저씨’가 아니다. 작가는 10대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화자는 그 와중에 50대 남자 작가의 도덕적 알리바이를 보증해주는 데 서술을 할애한다. 여기서 못 미더운 샤먼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의심은 좀 더 확장된다. 그는 단순히 온전한 접신을 이루지 못해 자신을 문득문득 드러내는 미숙한 샤먼이기보다는 침묵하는 망자의 목소리를 빌려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는 교활한 화자는 아닌가. 자신의 몸을 망자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망자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결백을 서술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침묵하지 않는 산 자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유추할 수 있다. 소설집에 수록된 문학평론가 박형준의 해설에 따르면 “단비와 은수, 두 소녀의 영혼과 대화하면서, 아이들의 가녀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하던 강동수 작가는 정작 자신의 소설 속 문장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살아있는 여성들의 비판에 대해선 “극렬 페미니즘 카페의 회원들”이기에 들을 가치가 없다고 반응한다.

침묵하는 희생자에 대한 선의와,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에 대한 거부감. 이것은 어딘가 이상하지만 놀랍진 않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노란 리본 프로필 사진을 달고선 페미니즘 운동이나 노동운동을 비난하는 계정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침몰했던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발화하는 이들을 향해선 ‘극렬 페미니스트’나 ‘강성 노조’ 같은 말로 배제하고 침묵시키려는 것은, 이 사회가 세월호에 대해 제대로 된 애도를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애도가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라면, 그것은 죽은 타자가 남긴 책무를 자신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기억하고 갱신하는 것이리라. 눈물로 개인적인 죄의식을 정화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시민의 의무를 재차 확인하는 것. 세월호에 대한 국민적 다짐과도 같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의 진정성은 여기에 있다.

위근우|칼럼니스트

위근우|칼럼니스트

실패한 애도로서의 ‘언더 더 씨’가 조금도 흥미롭거나 풍성한 텍스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건 이 지점이다.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여기엔 침묵에 대한 선호, 결코 공격적인 요구로 구체화되지 않는 조용함에 대한 선호가 있다. 침묵하는 대상에 대해선 미안함을 안고 살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대해선 순수성을 의심한다. ‘언더 더 씨’와 강동수 작가가 각각의 대화 상대를 대하는 방식을 비교해보라. 자신의 목소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의존적인 약자만이 우호적인 소통의 대상이 된다. 작가가 작품에서 또 작품 바깥에서 한 시대의 어른으로서 말하는 세월호와 어린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래서 기만적이다. 왜 우리는 살아있었다면 20대 초반의 동시대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냈을 세월호 희생자와 살아서 목소리를 내는 동시대 여성을 연결하지 못하는가. 그 둘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문학적 상상력 아닌가. 기껏해야 자두와 젖가슴이나 연결하면서 생기발랄한 학생의 육체적 젊음만을 아쉬워하는 것 어디에 전복적 상상력이 있고 윤리가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인칭대명사의 선택은 윤리의 문제다. 나의 자리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 내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인식하는 것, 나와 그들의 공통의 책임을 확인하거나 구분하는 것, 너와 나의 대화 속에 우리의 세계를 함께 반성적으로 구성해가는 것. 세월호 이전에도 중요했고, 세월호 이후엔 더더욱 요구되는 민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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