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권의 네이버 웹툰 ‘병의 맛’…세상의 폭력 노출된 10대 주인공, 안쓰럽다 그리고 와닿는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웹툰 <병의 맛> 주인공 변이준은 같은 반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머리에서 검은 무언가가 폭발하는 환상을 경험한다(그림 왼쪽). 그는 교실에서 외톨이다. 네이버 웹툰 갈무리

웹툰 <병의 맛> 주인공 변이준은 같은 반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머리에서 검은 무언가가 폭발하는 환상을 경험한다(그림 왼쪽). 그는 교실에서 외톨이다. 네이버 웹툰 갈무리

※웹툰 <병의 맛> 미리보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학교 가기 싫다.’ 네이버 웹툰 <병의 맛> 첫 화 첫 내레이션이다.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에 올라와 새로운 반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 변이준은 학교에 도착하기까지 이 말을 세 번이나 한다. 학교 가기 싫다, 라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학교 가기 즐거운 학생이 얼마나 될까. 학교에 무사히 도착한 뒤에도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한 그는 쉬는 시간마다 ‘교복 마이’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한다. 물론 이 역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학기 초에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혼자 밥을 먹고 실습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도 어울리지 못하지만,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한쪽 눈을 가린 채 아이들과 어울리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혹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의 자신을 즐기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 이름조차 ‘중2병’을 거꾸로 한 듯한 변이준이지 않은가. 다시 고백하자면, 1화에서 자신의 상황을 툭툭 내뱉듯 고백하는 변이준에 대해 독자로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거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첫 화 마지막 즈음, 교실 아이들의 눈이 자신에게 쏠리자 자기 머리에서 검은 무엇이 폭발하는 환상과 함께 발작하며 쓰러질 때조차 이준의 타고난 예민함이 만들어낸 상황처럼만 보였다. 그랬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병의 맛>의 이준은 정신적인 병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검은 기운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역시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작은 정령 같은 것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작은 정령들은 이준을 용사님이라 부르며 언젠가 검은 마왕을 무찌를 존재라고 말해준다. 그냥 공상이나 자기 캐릭터에 대한 설정 놀음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검은 것이 자신을 공격할 때마다 이준은 정말로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공포를 느낀다. 아마도 공황장애로 의심되는 질병과 함께 그는 반 아이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역설적으로 더 단절된다. 그에게 학교는 끊임없는 불안함의 장소다. 유일하게 마음을 열게 되는 상대인 이순이에게 이준은 말한다. “‘불안한 게 없는데도 앞으로 불안해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함, ‘불안할까 봐 불안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이 불안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것의 공격처럼 불가해하며 또한 불가항력적이다. 우연이겠지만, 그 검은 기운이 뾰족하게 솟아 이준의 심장을 찌르거나 몸을 옥죄는 모습은 하일권의 과거작인 <방과 후 전쟁활동>에서 역시 불가해한 존재로 그려지는 외계에서 온 구체의 공격과 흡사하다. 이준의 고통의 근원을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그는 어딘가 하일권의 전작들에서 상처 받고 싸워나가던 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검은 기운, 공격 때마다 고통·공포 묘사
도피 과정에서 정신 잃은 뒤 ‘병의 원인’ 학교폭력 실체 드러나
작품 속 마음에 상처 준 공모자로 ‘현실의 어른’일 가능성 환기

성장물에 가깝지만 20대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던 <목욕의 신>이나 네이버 웹툰의 19금 성인물 확장의 첨병 역할을 했던 <스퍼맨> 등을 제외하면, 하일권의 작품 속 10대 주인공들은 언제나 세상의 폭력에 노출되어 상처를 받았다. 데뷔작 <삼봉이발소>의 박장미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심한 외모 콤플렉스와 남학생들의 무시에 시달렸으며, <3단합체 김창남>의 이호구는 이름처럼 호구 취급을 당하며 ‘왕따’에 ‘빵셔틀’ 노릇을 해야 했고, <안나라수마나라>의 윤아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 급여를 가불하려다 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할 뻔한다. <방과 후 전쟁활동>에서 예비군으로 편성된 아이들이 상대해야 할 외계 구체는 현실적인 폭력의 맥락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아이들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방과 후 전쟁활동’을 해야 했던 건 수능 가산점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폭력적인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견디는 것과 싸우는 것은 구별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준이 그러하듯, 일상을 견뎌내는 건 이미 격렬한 전투다. 그 자체로 비극적인 결말이었던 <3단합체 김창남>이나 <방과 후 전쟁활동>을 차치하더라도, 아이들의 싸움은 승리로 연결되지 못한다. 단지 미숙하지만 친구 같은 어른인 김삼봉(<삼봉이발소>)이나 ‘ㄹ’(<안나라수마나라>)의 위로와 함께 본인 역시 그 시기를 어떻게든 견뎌낼 뿐이다.

얼핏 <병의 맛>의 구성은 <삼봉이발소>나 <안나라수마나라> 같은 10대 치유 만화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불가해한 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가능한 것은 누군가에게 용기를 받고 또 용기를 주며 버텨내는 것뿐이다. 이준이 자신처럼 외톨이지만 남 눈을 의식하지 않는 순이에게 약간의 동질감과 호기심을 갖고 조금씩 마음을 여는 과정은 하일권의 탁월한 작화와 표현력을 통해 느릿하지만 섬세하게 묘사된다.

사실 <병의 맛>의 작화와 연출은 그것만으로도 작정한 비평이 필요한 수준이다. <목욕의 신>의 엄청난 히트 이후 그는 “요즘은 다들 디지털 작업을 하고 펜 태블릿으로 그리니까 누가 그려도 선이 똑같다. 그림체 정도만 구분할 정도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손맛을 살리는 예전 그림체가 독자에게 더 와닿지 않을까”라고도 했지만, <병의 맛>은 정말로 아주 미세한 눈썹 선의 차이만으로 역시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표현해낸다. 국어 수행평가를 같이하고 숙제 노트를 집에 가져다주는 아주 작은 사건들 안에서 이준과 순이는 남들에겐 별것 아니지만 본인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친구 관계를 조금씩 만들어간다. 우정에도 ‘썸’ 단계가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 게다. 이제 거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관계가 된 순이가 새 학기 첫날 손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이준이 뛸 듯이 기뻐하는 장면에서 독자 역시 미소를 짓게 된다면, 작가의 솜씨에 홀려 이준의 작은 심경의 변화마다 이입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다. 이준의 눈앞에 실제 마왕이 등장해 이준이 극도의 공포를 느낀 순간, 나 역시 섬뜩한 기분을 느낀 것은. 지금까지 이준이 어렵게 견뎌내 겨우 쟁취한 일상의 행복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던 것은.

[위근우의 리플레이]하일권의 네이버 웹툰 ‘병의 맛’…세상의 폭력 노출된 10대 주인공, 안쓰럽다 그리고 와닿는다

마왕의 존재와 검은 것의 공격, 그리고 집으로 도피해 시간 감각을 잃고 반쯤 정신을 잃은 이준의 모습과 함께 공상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질 즈음, 작품은 불가해하게 보였던 병의 원인을 이야기한다. 이준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으며 마왕은 정학 기간이 끝나 돌아온 가해자였다. 학교폭력 피해 이후 불안장애에 의한 공황장애를 겪어온 이준은 자신의 눈에 보이던 환상들에 대해 이렇게 독백한다.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망상하면서 노는 거예요. 제가 스스로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설명이 안되잖아요.’ 이것은 서사적인 반전이지만 속임수는 아니다. 작가는, 이준은, 독자를 속인 적이 없다. 다시 첫 화 첫 내레이션. ‘학교 가기 싫다.’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첫 화에서 그는 만화적으로 과장된 엄청난 경사의 내리막을 보며 이렇게도 말했다. ‘학교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는 이미 신호를 보냈다. 세상에, 그리고 독자에게. 기존 작품 안에서 꾸준히 어른의 책임에 대해 질문하던 하일권은 독자들을 향해 그 어른이 우리일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어리고 예민한 마음에 입은 상처와 그 방어기제를 ‘중2병’이라는 말로 폄하하진 않았는가? 누군가의 일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폭력을 시간이 지나면 잊힐 일이라고 넘어가진 않았는가? 이것이 공모자로서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동안 하일권의 작품 안에서 그려져 왔던 폭력이 일상적 무관심 때문에 존속하는 것임을 <병의 맛>은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뼈아프지만 적어도 작품 속 아이들의 힘겨운 싸움에 우리가 동참할 여지를 열어준다. 마왕은 분명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준도 혼자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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