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을 입은 채 나는 싸운다" 온몸으로 시를 쓰는 김혜순 시인

이영경 기자
등단 40주년을 맞아 열 세번째 시집 <날개 환상통>을 펴낸 김혜순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등단 40주년을 맞아 열 세번째 시집 <날개 환상통>을 펴낸 김혜순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 죽을 만큼 아프다고 죽겠다고/ 두 손이 결박되고 치마가 날개처럼 찢어지자/ 다행히 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종종 그렇게 날 수 있었다고/ 문득 발을 떼고/ 난간 아래 새하는/ 일종의 새소리 번역의 기록/ 그 순서”(‘새의 시집’)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은 김혜순 시인(64)이 열 세 번째 시집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동작이 굉장히 여성적이에요. 새들이 함께 날아오를 때, 새와 새 사이도 날개가 되는 것 같아요. 새와 새 사이와 마찬가지로 나와 타자가 만났을 때 그 사이 공간에서도 무언가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느꼈어요. 그런 것들을 ‘새’라고 표현한 것 같아요.”

시집 전편을 아우르는 것은 ‘새하다’는 말이다. 동사도 명사도 아닌 낯선 어법을 김혜순은 2017년 펴낸 시론집 <여성, 시하다>에서도 사용한 바 있다. 지난 21일 전화를 통해 만난 김혜순은 “시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법은 은유다. ‘내 마음은 호수’라고 했을 때 둘을 호수에 비유하는 대자아의 강력한 파워가 생기는데, 굉장히 남성적인 표현법으로 느껴졌다. 시는 액션이고, 수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혜순 시인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고민하고 글로 써왔다. 그는 “나는 매번 발명해야 한다. 언어를. 나에겐 선생님도, 선배도 없다. 나에게 여성적 모국어의 전범은 없다. 당연히 내 몸의 내재적 파동의 원리에 따라 새로 발명한 언어가 뛰어놀 수 있는 장도 없다.”(<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고 말해왔다.

시집 곳곳엔 여성에 대한 다양한 폭력과 차별이 흩뿌려져 있다. “내 존재론적 바탕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눈에 띠는 건 최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낙태죄와 관련된 시다. 시 ‘중절의 배’엔 낙태가 금지된 나라의 여성들을 태우고 공해에서 중절 수술을 했던 레베카 곰퍼츠의 배 ‘파도위의 여성들’과 네덜란드로 낙태 여행을 가는 여성들이 나오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혜순은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을 무척 좋아했다. 그에 대한 오마주의 뜻도 있었다”며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것에 대해선 “당연한 결과다. 우리나라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혜순 시인은 2016년 펴낸 시집 <죽음의 자서전>으로 최근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에 최종 후보로 올랐다. 최종 수상작은 오는 6월 발표된다. 등단 40주년을 맞아 세계 권위있는 문학상 후보에 오른 시인에게 감회를 물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미 시집으로 낸 시들은 남의 것이 된 것 같아서 돌아보지 않는다”란 답이 돌아왔다.

치열하게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해 온 김혜순은 최근 페미니즘 열풍에 대해 “90년대 페미니즘이 소멸 직전이다가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마치 응축된 것이 폭발하듯 터져나온게 보기 좋다”고 말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김혜순에게 시 쓰기란 ‘새장’에 갇힐 지언정, 그걸 입은 채로 싸우고, 종래에는 그것을 벗어나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내 몸을 조여오는/ 이 새장을 벗지 못하는 나는…새장을 입은 채 나는 싸운다/ 저 숲과/ 저 산과/ 저 밤과”(‘바닥이 바닥이 아니야’)

"새장을 입은 채 나는 싸운다" 온몸으로 시를 쓰는 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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