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마음에서 언어가 터진다, 번진다…나를 찾는 그 길이 환하다

김유진

어린이의 말과 글

<단어의 여왕>에서 아빠와 함께 고시원에 몰래 사는 주인공은 시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비룡소 제공

<단어의 여왕>에서 아빠와 함께 고시원에 몰래 사는 주인공은 시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비룡소 제공

어른 시인이 쓴 동시와 구별되는 ‘어린이 시’
어린이의 글에는 감정과 생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떠하든
마음속에서 길어 올린 단어를 통해 성장하는 아이들
아동문학도 결국 그러한 어린이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

아윤이가 늑목을 도전한다
근데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추운 거처럼
덜덜 떨었다
아윤아 무서우면
내려와

(‘오늘 아침 늑목’)

<오이는 다시 오이꽃이 되고 싶어 할까?>(삶말·2020)에 실린 1학년 문현주 어린이의 시다. 친구들처럼 늑목 위에 올라가 놀고 싶어서 용기를 내보는 아윤이의 마음과, 아윤이의 도전을 응원하면서도 마음까지 살피는 어린이 화자의 시선이 반짝인다. “도전만으로 훌륭해, 이번에 반드시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다독이는 말은 어쩌면 친구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 수도 있겠다. 애써 언어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찾지 않아도 순간 밀려오는 마음들에, 이게 바로 문학이지 달리 문학이란 문턱을 만들고 가를 필요가 있을까 싶다.

<b>오이는 다시 오이꽃이 되고 싶어 할까?</b>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글보라 엮음 | 삶말 | 2020

오이는 다시 오이꽃이 되고 싶어 할까?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글보라 엮음 | 삶말 | 2020

어린이도 시를 쓴다. 시는 대개 짧으니까, 긴 글을 쓰기 어려워하는 어린이들이 자기 감정과 생각을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 된다. 어린이가 쓴 시는 대개 ‘어린이시’라고 부르며 어른 시인이 쓰는 ‘동시’와 구별한다. 어른 작가가 쓰는 동시가 물론 문학예술로서 정제된 형식을 지니지만 어린이시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어린이시에는 어린이의 가슴에서 곧바로 터지고 번지며 자기 존재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언어가 꿈틀댄다. 나는 틈틈이 어린이시집을 읽을 때마다 늘 새로운 어린이를 발견하고, 찬탄한다. 그러고는 어른인 내가 어린이에 대해 말하고 쓰는 일에 기분 좋게 겸손해진다.

어린이시를 비롯해 일기, 편지 등 어린이의 글에는 그들의 감정과 생각이 생생하게 숨 쉬므로 동화에서도 이를 종종 이용한다. 시, 일기, 편지 형식을 가져와 어린이 인물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장치에서는 어린이가 글을 쓴다는 행위가 어린이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도 엿볼 수 있다.

단어에는 빛이 있다

<단어의 여왕>(신소영·비룡소·2022)의 여성 어린이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아빠와 함께 고시원으로 이사를 가야 하게 됐다. 1인실 고시원에서 몰래 살아야 하는 형편이니 유일한 친구인 반려견과도 잠시 헤어져야 한다. 고단한 현실에서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건 시다. 국어 시간에 읽은 시를 아름답게 느끼고, “단어에는 빛이 있다”(<단어의 여왕> 10쪽)는 사실을 발견한 어린이는 단어를 하나씩 모아간다. 그 단어들은 반딧불이처럼 아주 작게 깜빡이면서도 꺼지지 않는 빛으로 어린이의 앞길을 조금씩 밝혀준다.

전철로 열 두 정거장인 ‘고시원에서 학교까지’ 먼 길은, ‘푸름역에서 고란역까지’라는 역 이름에서 ‘푸른 고라니’의 길이 된다. 돈과 빵이 없는 어린이에게 단어가, 길고 외로운 길에 푸른 숨을 불어넣어준다. 낮은 침대와 책상 말고는 앉을 자리 없이 좁은 방에서 왈칵 눈물이 나오려 할 때는 ‘고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 단어는 빛이 난다. 겁을 없애주는 빛, 슬픔을 만들지 않는 빛, 무엇보다 이곳에서 들키지 않고 살 수 있는 빛!”(<단어의 여왕> 37쪽) 부동산 중개업소 유리창의 전단에 적힌 ‘숫자 0’들을 보고는 ‘0과 집’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며 새 집에 대한 소망을 담아내기도 한다.

<b>단어의 여왕</b> 신소영 글 | 모예진 그림 | 비룡소 | 20220

단어의 여왕 신소영 글 | 모예진 그림 | 비룡소 | 20220

나에게 0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면
동그란 지붕을 얹을 거야
눈이 내려서 쌓이면
동그란 모자를 쓴 것 같겠지?
나에게 0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면
동그란 창문을 달 거야
동그랗게 들어오는
햇빛 손님을 맞이해야지
나에게 0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면
동그란 벽거울 뒤에
동그란 그림자 통로를 만들 거야
강아지와 놀 때 그 속으로 들어가야지
나에게 0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면
그 다락방엔 비밀을 넣어둬야지
단어의 비밀을

(<단어의 여왕> 52~53쪽)

<단어의 여왕>은 어린이를 자기 왕국의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언어의 빛을 말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휩쓸려버리지 않은 채 여전한 자신으로 현실을 통과하며 새로운 자신으로 서는 데 언어가 힘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글은 일용할 양식이 되지는 못하지만 분명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세계를 조금씩 혹은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창작 작업으로 이를 경험한 작가들은 어린이가 글을 쓰는 이야기들로 어린이의 삶을 변화시키는 언어의 힘을 말하고 있다.

<b>Love That Dog: 아주 특별한 시 수업</b> 샤론 크리치 지음 | 신현림 옮김 | 로트라우트 S 베르너 그림 | 비룡소 | 2009

Love That Dog: 아주 특별한 시 수업 샤론 크리치 지음 | 신현림 옮김 | 로트라우트 S 베르너 그림 | 비룡소 | 2009

<Love That Dog: 아주 특별한 시 수업>(샤론 크리치·비룡소·2009)은 어린이 주인공이 쓴 여러 편의 시로 엮은 책이다. 시 수업에서 읽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오는 저녁 숲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윌리엄 블레이크의 ‘타이거(The Tiger)’,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빨간 외바퀴 손수레(The Red Wheelbarrow)’ 등이 인용되고, 이 시를 변형시키거나 시의 감상을 정리한 어린이시가 이어진다. 어린이의 시에는 종종 개가 등장하는데, 어린이는 사랑하는 반려견을 교통사고로 잃은 이야기를 시 수업이 끝날 무렵 비로소 시로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슬픔이 온전히 언어가 된 후 마지막으로 ‘그 개를 사랑한다(Love That Dog)’는 제목의 시를 쓴다.

그 개를 사랑한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사랑하듯이
그 개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주 특별한 시 수업> 93쪽)

시를 쓰며 상실의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다.

<b>시인 X</b> 엘리자베스 아체베도 지음 | 황유원 옮김 | 비룡소 | 2020

시인 X 엘리자베스 아체베도 지음 | 황유원 옮김 | 비룡소 | 2020

온전한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힘

<시인 X>(엘리자베스 아체베도·비룡소·2020)는 여성 청소년이 화자인 연작시들로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시오마라의 시들은 독립된 한 편의 시이면서도 한 편의 소설처럼 이야기가 연결되고 진행된다. 시뿐만 아니라 글쓰기 과제물, 친구와의 대화, 휴대폰 문자 메시지 등 일상의 다양한 텍스트까지 모두 시로 엮어내면서 여성 청소년의 삶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시 소설’이라 부를 만한 독특한 형식은 소설과 시를 동시에 읽는 듯한 특별한 독서 체험을 선물한다. 책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흐르는데 이 이야기를 자기 고백 장르인 시로 솔직하게 들려주니, 시오마라가 정말로 내가 잘 아는 친구처럼 느껴진다.

10대 소녀의 일상 고백이라 해서 따뜻하거나 상큼한 이야기를 떠올렸다면 그건 편견이다. 소녀의 일상은 전쟁터다. 도미니카계 미국인인 시오마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가정에서 이중의 억압을 겪는다. 시대와 동떨어진 종교 제도와 교리, 남자친구와의 만남이나 성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어머니, 어느 장소에서든 온갖 형태로 일어나는 성추행……. 제각각으로 다가오는 폭력은 하나로 수렴된다. 여성 청소년의 자유와 꿈, 그리고 신체에 대한 억압.

시오마라는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현실을 비밀노트에다 시로 쓴다. 그의 이름 시오마라(Xiomara)가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듯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시 쓰기는 전투 의지를 확인시키는 동시에 전장에서 실질적인 무기가 된다. 쓰는 행위를 통해 시오마라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용기를 얻고, 그 힘으로 자신만의 성장을 밀고 나간다. 엄마가 비밀노트를 발견하고는 불태워버리자 “다시는 절대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전부 들여다보고 망가뜨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시인 X> 426쪽)라고 다짐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 경연 대회인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에 참여해 자기 삶을 담은 언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과제물 초고’는 매번 비밀노트에 남겨두고 늘 다른 ‘과제물 완성본’을 제출했던 시오마라의 글쓰기는 시 경연대회 이후 드디어 하나가 된다. 시인인 소녀에게 자신을 가두고 숨기는 비밀노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시인 X’는 이름 시오마라(Xiomara)의 첫 글자이자, 여성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에 대한 거부이자, 누구든 X의 자리에 올 수 있다고 독자에게 건네는 초대이다. “말에는 사람들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시인 X> 470쪽)는 사실을 앞서 경험한 자가 외치는 전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행위에는, 껍데기는 가고 진짜만 남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글쓰기에서 저마다 진짜 마음과 진짜 생각을 찾을 수 있다.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고 사유하면서 만들어낸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유롭고 당당할 수 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를 공부하면서는 알기 힘든, 시의 진짜 의미다.

<b>헨쇼 선생님께</b>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 선우미정 옮김 | 보림 | 2009

헨쇼 선생님께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 선우미정 옮김 | 보림 | 2009

언어의 간격 사이로 비치는 어린이의 마음

<헨쇼 선생님께>(비벌리 클리어리·보림·2009)는 어린이 주인공 리가 동화작가 보이드 헨쇼와 팬레터를 주고받으며 작가의 권유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글쓰기를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과정을 따듯하게 그린다. 처음에 리는 일기 쓰기를 어려워하다가 “선생님 말대로 제 일기를 누군가한테 보내는 편지라 생각하고 써보려 해요. (…) 선생님한테 보내는 편지처럼 쓰게 될 것 같아요”(<헨쇼 선생님께> 44쪽)라고 결심하며 일기를 써 나간다.

리가 쓰는 편지와 일기가 줄곧 교차되면서, 두 글의 간극 사이에 비치는 리의 마음은 독자에게 증폭된다. 리가 헨쇼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나, 혼자 쓰는 일기나 모두 똑같이 ‘헨쇼 선생님께’로 시작하지만 두 글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편지에는 부모님 이혼 후 만나지 못한 아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제 생각에 아빠는 저한테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전화한다고 해 놓고 아직 안 했거든요”(<헨쇼 선생님께> 63쪽)라고만 알린다. 반면 일기에서는 지난해 세 가족이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에 ‘신발 한 짝’이란 제목의 우스꽝스러운 시를 각자 지어 부르던 기억을 세세하게 떠올린다. 그러고는 지난 크리스마스를 엄마가 기억할지 궁금해한다.

간결하고 공식적인 편지와 꾸밈없는 마음을 담은 일기의 대비로,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 행복했던 순간을 그리워하며 재결합을 기대하는 리의 마음은 더욱 애틋해 보인다. 어른이 안다고 자부하는 어린이의 마음이란 고작 ‘편지’ 수준에 불과하지 않은지, ‘일기’의 저 깊은 마음들을 만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동화에서 어린이의 시나 일기는 어른 독자를 선뜻 어린이 마음 한가운데로 초대하면서 한편으로 계속 질문하는 것 같다. 당신은 과연 어린이를 얼마나 잘 알고 있나요.

리는 ‘어린이 작품집’의 응모글로 밀랍인간이 녹아 사라지는 소설이나 수천㎞를 이동해 겨울을 나는 모나크 나비에 대한 시를 쓰려다, 아빠가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양조장에 따라 갔던 어느 하루 이야기를 쓴다. 자기 마음에 가장 중요하게 자리한 아빠에 대해 결국 쓸 수 있던 건 헨쇼 선생님과의 편지와 일기가 이끌어낸 길이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말고 오직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일, 그게 바로 글쓰기라는 사실을 직접 글을 써보며 깨달았을 듯하다.

앞서 살핀 작품 모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로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그 첫걸음을 보여주면서 도와준다. 결국 아동문학이란 이처럼 어린이의 언어를 찾아가고, 찾아주는 과정이다. 그것이야말로 아동문학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 일일 거라 믿는다.


■김유진

[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④] 어린이의 마음에서 언어가 터진다, 번진다…나를 찾는 그 길이 환하다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서강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아동문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이와 문학’에서 동시를 추천받고,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2009)과 평론 부문(2012)을 수상했다. 연구, 창작, 평론 등 다양한 시선으로 아동문학을 탐색 중이다.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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