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마음을 채워주세요

김유진

⑦ 한국인의 밥상, 어린이의 밥상

<오늘부터 베프! 베프!>의 삽화. 문학동네 제공

<오늘부터 베프! 베프!>의 삽화. 문학동네 제공

밥에 목숨 거는 한국인이라지만…주변엔 음식 먹으며 건강하게 자랄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들 여전
복지란 그들이 그저 밥 굶지 않게 해주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한당한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키고 존엄을 지키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어린이에게 밥은 먹여야지!

최근 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별안간 어린이에게 밥을 먹이는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어릴 적 스웨덴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식사시간이 되어 친구 엄마가 밥을 먹으라고 부르자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만 남겨 두고 혼자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는 것. 예정된 식사 초대가 아니므로 스웨덴 문화에서는 가능하다는 해석에 전 세계인은 경악했고 한국인 유저들 또한 의견이 분분했다. 아동학대다, 양육자가 가사노동에 매여 있지 않은 문화에서는 갑자기 1인분의 식사를 추가로 준비하기 어렵다, 양이 모자란 대로 나눠먹으면 되지 않느냐, 농사에 척박하고 식량이 부족했던 지역의 문화로 이해할 법하다, 식사를 대접하며 손님에게 부담을 강제한 역사적 풍속이 있었으므로 오히려 손님의 자율권을 존중한 행위다…… 그럴듯하기도, 얼토당토않다 싶기도 한 온갖 문화 분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러 의견이 북적이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건 까칠한 개인주의 성향의 유저가 많은 이 SNS에서조차 어린이 손님이 끼니를 걸러야 했던 상황을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가 굶은 양 분노하고 흥분하는 점이었다. 스웨덴 문화 분석의 수다한 결론은 ‘그래도 어린이에게 밥은 먹여야지! 어린이에게 밥을 안 주면 쓰나!’였다.

‘어린이’도 물론 중요하거니와 ‘밥’에 대동단결한 것 같았다. 트렌드가 조금씩 달라졌을 뿐 20여년간 ‘먹방’이 모든 방송사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자리하고, SNS에 음식 사진이 넘치는 나라의 국민다웠다. 문득 ‘밥 안 주는’ 스웨덴 문화가 아닌 ‘밥에 목숨 거는’ 한국 문화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한국인은 어쩌다 ‘밥의 민족’이 되었지? 놀이하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라고 부르듯 밥과 한국인의 관계를 일컫는 호모 ‘○○○’이란 개념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림책이 차린 풍성한 밥상

아동문학에서도 밥은 중요하다. 특히 그림책에서는 ‘먹방’의 카메라가 훑는 탐욕스럽고 소비적인 시선과 달리 우아하고, 정겹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풍성한 밥상이 넘친다.

그중 최고의 밥상으로는 동물 친구들의 자연 밥상을 꼽고 싶다. 영국의 고전 그림책 ‘찔레꽃 울타리’(Brambly Hedgy) 시리즈의 <봄 이야기>(질 바클렘 글·그림, 마루벌, 1994)부터 <겨울 이야기> 총 4권에는 사계절의 밥상이 담겨 있다. 들쥐 머위의 생일을 축하하는 봄 소풍에서는 제비꽃 사탕, 장미꽃 술, 개암 열매 케이크, 앵초 푸딩이 마련된다. 여름날 강물 위 뗏목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들쥐 눈초롱과 바위솔의 피로연에서는 차가운 물냉이 국, 신선한 민들레 샐러드, 꿀로 만든 크림 등 여름 음식이 차려진다. 찔레꽃 울타리 마을의 모든 음식을 저장해두는 그루터기 안 수십 개 방의 선반마다 빼곡히 들풀 열매, 꿀, 잼, 절임이 들어차 있는 이유는 들쥐 식구들이 가을에 부지런히 씨나 열매, 나무뿌리를 모아두어서다. 따뜻한 밤죽, 나무딸기잎차, 과일 과자로 한겨울도 따뜻하게 날 수 있다.

찔레꽃 울타리 마을에는 자연이 주는 선물에만 기대어 살아도 기근의 그늘 없는 목가적인 풍요로움이 넘친다. 영국의 유명 도자기 회사 로열 돌턴이 질 바클렘의 그림으로 ‘브램블리 헤지’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이 제품이 단종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빈티지 시장에서 인기 품목인 까닭은 풍요로움의 이데아를 선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가을이야기>에서 바쁜 일손을 도와 열매를 모으다가 길을 잃은 앵초가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포근한 이불 위에서 이런 자장가를 불러준다. “수염을 내리고 편안히 쉬거라. 꿀과 우유와 과자가 가득하단다. 밤새 부디 좋은 꿈만 꾸거라. 내일 다시 해님이 떠오른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낙원으로 상징되듯 풍요로운 음식이 불러오는 특별한 평화와 안정감이 어린이에게 내려앉는다.

풍요로운 음식으로 충만해지는 그림책은 많다. 또 다른 들쥐 가족의 이야기인 ‘14마리 시리즈’ 중 <14마리의 아침밥>(이와무라 카즈오 글·그림, 한림출판사, 2002)에도 가족 모두가 산딸기를 따오고, 도토리빵과 버섯 수프를 만들어 차린 아침상이 나온다. <까마귀네 빵집>(가코 사토시 글·그림, 고슴도치, 2002)에서는 눈사람빵, 장화빵, 망치빵 등 기상천외한 빵 수십 가지가 어린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구도 노리코의 ‘우당당탕 야옹이 시리즈’와 ‘삐악삐악 시리즈’에서도 <빵 공장이 들썩들썩> <초밥이 빙글빙글> <아이스크림이 꽁꽁> <카레가 보글보글> <케이크가 커졌어요!>(책읽는곰) <삐악삐악 수퍼마켓> <삐악삐악 생일파티>(책내음) 등 여러 권이 어린이를 음식의 나라로 초대한다.

<b>수박 수영장</b> 안녕달 지음 | 창비 | 2015

수박 수영장 안녕달 지음 | 창비 | 2015

풍요로움은 다채로운 음식 종류뿐 아니라 엄청난 스케일로도 그려진다. <수박 수영장>(안녕달, 창비, 2015)에서 사람들이 커다란 수박에 들어가 헤엄치고, <아주아주 큰 고구마>(아까바 스에끼찌, 창비, 2007)에서 어린이들이 상상한 고구마가 공룡이 되고 그걸 다시 튀김, 군고구마, 맛탕으로 만들어 먹을 때 해방감까지 한가득 맛볼 수 있다.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나카가와 리에코 글, 오무라 유리코 그림, 한림출판사, 1995)에서 들쥐 구리와 구라는 자기 몸보다 몇 배 큰 달걀을 발견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먹어도 다 못 먹는” 커다란 카스텔라 빵을 만들어 숲속 동물과 나누어 먹는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채인선 글, 이억배 그림, 재미마주, 1998)는 설날에 만두를 빚는 풍속에 바탕해 흥성스러운 장면들을 큰 스케일로 그려내며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책이 됐다.

<b>아주 아주 큰 고구마</b> 아까바 스에끼찌 지음 | 양미화 옮김 | 창비 | 2007

아주 아주 큰 고구마 아까바 스에끼찌 지음 | 양미화 옮김 | 창비 | 2007

“만두 만두 설날 만두/ 아주 아주 맛난 만두/ 숲속 동물 모두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아/ 한 소쿠리씩 싸 주고도 남아/ 일년 내내 사시사철/ 냉장고에 꽉꽉 담아/ 배고플 때 손님 올 때/ 심심할 때 눈비 올 때/ 한 개 한 개 꺼내먹는/ 손 큰 할머니 설날 만두”

<b>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b> 채인선 글·이억배 그림 | 재미마주 | 1998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채인선 글·이억배 그림 | 재미마주 | 1998

흥겹게 노래 부르며 할머니와 동물들이 만드는 만두소의 크기는 언덕만 하고, 만두피가 될 밀가루 반죽은 “방 문턱을 넘어 툇마루를 지나 마당을 지나 울타리 밖”까지 밀려간다. 반죽이 소나무 숲에 이른 걸 보고서야 할머니는 허리 펴고 일어나며 말한다. “아이고, 나도 이제 늙었나 봐. 힘이 달리네. 지난 설에는 저 소나무 숲을 지나서도 한참 뻗어 나갔는데…….” 요리하는 이라면 주변 모두를 푸짐히 먹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진하게 전해진다. 그 마음이 우리 어린이들을 건강하게 길러냈을 거다.

밥 못 먹는 어린이들 이야기

반면 동화에서는 밥을 먹지 못하는 어린이의 몇몇 이야기가 유난히 선명하다. 모든 어린이는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영양 있는 음식을 먹으며 건강하게 자랄 권리가 있음에도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화들이다.

<b>소나기밥 공주</b> 이은정 글·정문주 그림 | 창비 | 2009

소나기밥 공주 이은정 글·정문주 그림 | 창비 | 2009

<소나기밥 공주>(이은정, 창비, 2009)에서 주인공 공주는 친구들의 시선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식 시간마다 소나기밥을 먹는다. 소나기밥은 ‘보통 때에는 얼마 먹지 아니하다가 갑자기 많이 먹는 밥’을 뜻하지만 공주는 다른 끼니를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먹지 ‘못하기’ 때문에 소나기밥을 먹는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가 심각한 중독 증상을 자각하고 어느 날 갑자기 재활원에 자진 입소하면서 공주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끼니는 학교 급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어 두자!”(12쪽)를 생존 전략으로 삼고서, 공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소나기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 재산 560원으로 콩나물 한 봉지를 사오던 공주는 이웃집에 배달된 장바구니를 훔치고 폭식을 반복한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뭔가 허전하고, 뭘 더 먹었으면 싶고, 배가 아주 부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다 먹고 나니까 배가 불렀지만 허전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고, 배가 좀 더 부르면 괜찮아질 것 같아 더 먹었다. 아주 불편하고 숨이 막히기 직전까지 가서야 먹는 걸 멈출 수 있었고, 체하고 토하기를 거듭했다. 공주의 허기는 밥으로만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소나기밥 공주>가 출간된 2009년과 달리 현재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평일 조식과 석식을 사 먹고 휴일에도 사용할 수 있는 아동급식카드가 생겼다. 이제 최소한 제도적으로는 다행히 공주 같은 어린이가 없을 듯해 안심이 된다. 아동급식카드는 기초수급자와 차상위층 가정의 어린이뿐만 아니라 한부모 가정, 지역아동센터나 사회복지관을 이용하는 어린이에게까지 지원되므로 모든 어린이가 보호자의 돌봄이 미치지 못하는 시간에도 허기를 참지 않고 성장기를 지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공주는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에 보호자가 만성질환으로 양육 능력이 미약한 조건이 겹쳤는데도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어려움을 겪었던 걸 떠올리면 이미 지난 과거여도 마음이 다시 무겁다.

<b>오늘부터 배프! 베프!</b> 지안 글·김성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

오늘부터 배프! 베프! 지안 글·김성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

<오늘부터 배프! 베프!>(지안, 문학동네, 2021)는 아동급식카드를 매개로 오늘날 어린이의 밥을 이야기한다. 급식카드 지원은 분명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랄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급식카드가 생겨 잔뜩 들뜬 서진은 자기 카드가 친구 유림의 체크카드와 다르다는 걸 알아가며 점점 풀이 죽는다. 급식카드로는 유림에게 만날 얻어먹기만 하던 떡볶이 집에서 한 턱 쏠 수도 없고, 손수 간식을 만들어주는 유림이 엄마에게 생일 선물로 드리고 싶은 초콜릿을 살 수도 없다. 이제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꾸 문턱이 막혀버린다. 서진이의 급식카드를 따라가다 보면 복지란 그저 밥을 굶지 않게 해주는 걸 끝으로 삼지 말고 남들과 달리 제한당한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키는 걸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에게도 급식카드를 원하는 대로 쓰고 싶은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관계가 있다. 급식카드를 쓰며 움츠리지 않도록 마련돼야 하는 존엄이 있다. 이 동화는 급식카드를 내보이며 우리 사회가 어린이의 밥을 얼마만큼 정성스럽고 세심하게 차리는지 묻는다. 반갑게도 서진은 ‘급카’ 선배인 소리와 ‘밥 친구’가 되고, 주말 7000원·주중 4500원으로 한정된 밥값으로 산 참치통조림을 아기 고양이에게도 나누어준다.

편의점 음식으로 야무지고 알뜰하게 밥을 챙기는 서진과 소리의 모습에 흐뭇하다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원에 다니느라 시간이 없어서 끼니를 거르거나 때우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밥상으로 걱정이 번진다. SNS에서 떠돌던 스웨덴 일화에 다들 기겁했지만 우리는 정작 어린이와 청소년의 밥을 제대로 챙기고 있을까. 중고생은 과도한 학업에 지친 나머지 밥 먹을 시간에 숫제 아침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겠다며 아침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상당수 학생이 학교와 학원, 학원과 학원 사이에서 굶지 않으면 다행인 스케줄로 살아간다. 그렇게 공부하고 대학에 입학했어도 청년이 되어서는 돈 없이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또 밥을 줄인다.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은 사회의 여전한 외모 압박에 다이어트를 포기하지 못하기도 한다.

‘밥의 민족’이여,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밥을 주자. 앞서 살핀 동화들처럼 그들의 밥상을 계속 눈여겨보며 채워야 하겠다. 풍성함을 세상 모두와 나누던 그림책의 밥상이 바로 그들의 밥상이 되길 바란다.

■김유진

[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밥, 마음을 채워주세요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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