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믿기 전에 의심부터 하세요
정보 오염 시대에 꼭 필요한 ‘위생 습관’은 책 페이지 아래 정확한 자료로 주장 뒷받침하는 ‘각주’를 생활화하는 것
독백 아닌 진정한 소통으로 나아가기 위해 ‘대화의 각주’ 검증해주는 지식공동체도 가꿔야 해
지난달 말 미국의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2023년 올해의 단어로 ‘Authentic(진짜의)’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그럴 듯한 가짜’를 잔뜩 만들어내게 된 시대에 ‘진짜’의 가치가 한층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올해 초엔 AI로 만들어낸 트럼프 체포 사진, 혐오 발언을 하는 조 바이든의 가짜 영상 등이 이슈가 되기도 했고요.
다만, 이를 ‘AI의 문제’로 바라보면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사람들이 믿고 싶은 걸 믿는 데는, 대단히 그럴듯한 구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이점이 다가온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작 몇바이트짜리 텍스트에도 잘 속고, 천장 얼룩에서 신의 얼굴을 보고, 신묘한 최신식 기술로 100만원을 1억원으로 만들어준다는 유의 사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립니다.
오늘날 진짜 문제는, AI를 이용해 누구나 ‘손쉽게 그럴듯한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보다도 ‘주장의 근거 자체에 사람들이 전혀 신경을 안 쓰게 됐다’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보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사람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근거가 신빙성이 없어도, 근거가 없어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끼리끼리 모이고, 결코 서로 의견이 다른 집단 간에 대화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불통의 상황이 사회의 많은 혐오와 갈등 등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각주의 역사>와 <지식의 착각>을 지팡이 삼아 ‘대화’에 대해 해찰해보겠습니다.
‘각주의 감각’
책에 적힌 ‘각주’를 유심히 보시는 편인가요? 각주란 페이지의 하단에 적힌 참고문헌, 설명 등을 뜻하는데요. 저는 책을 읽다가 조그만 숫자가 붙어 있으면 살펴보곤 합니다. 각주에 적힌 책을 실제로 구해 펼쳐볼 때도 있는데요. 그러면 원래 저자의 주장이 어떤 근거와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에서 익숙하게 보는 영상이나 커뮤니티엔 ‘각주’ 비슷한 것이라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은 <각주의 역사>에서 책 속 ‘각주’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각주의 본질은 ‘주장의 근거’이자, ‘믿고 싶은 것이 아닌, 근거 있는 것을 말하게 하는’ 책임감의 장치입니다. 각주를 요구한다는 것은 그럴듯하게 소리지르는 웅변가에게 ‘주장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 근거의 출처는 어디고, 얼마나 믿을 만합니까? 그렇게 판단하게 된 경위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거죠. 근거 없이 모두 각자 자기 말만 한다면 ‘집단적 독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프턴은 ‘각주’야말로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핵심 문장을 짧게 옮겨보겠습니다. “각주 없이도 역사학의 명제를 칭찬하거나 반박할 수는 있어도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역사가는 각주를 사용해야만 자신의 글을 독백이 아닌 대화로 만들 수 있다.”
그래프턴에 따르면 근대적 의미의 ‘각주’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등으로 인해 기존의 ‘권위’ 대신 ‘과학’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칩니다. 과거 “짐이 곧 진리”였던 시기엔 말하는 사람의 권위가 내용보다 중요했으므로 근거를 들 필요가 없었지만, 과학의 시기가 오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생긴 거죠. 저자는 이런 ‘근거’의 필요성으로 인해 17세기 말 이후 점차 역사가 등이 자신의 주장에 규격화된 근거를 들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이것이 곧 각주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각주’를 오늘날 인터넷의 상황에 대어 생각해봅니다. 실은 각주라는 ‘형식’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브라운대 역사학과 교수인 카린 울프는 한 칼럼에서 오늘날 탈진실사회의 ‘각주’의 필요성에 대해 “‘각주 다루기’는 정보 오염의 시대에 대처하는 위생 습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야 한다”면서 “각주를 통해 우리는 주장의 증거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지식이 풍부한 시민이 되는 법을 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각주의 감각’이라는 문구를 떠올려봤습니다. 어떤 주장을 만났을 때 주장의 근거를 신경 쓰는 감각입니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근거가 있는 경우 그 근거가 어디서 어떤 경로로 왔고, 그것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 등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려 하는 감각이죠. 하지만 오늘날 이런 감각을 기르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로 정보를 얻는 플랫폼이 각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지 않는 등의 문제들 때문입니다.
‘좋은 각주’의 조건
그래프턴은 각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요술지팡이’는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각주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며 ‘어떤 각주’인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적합한 각주’의 요소라고 할 만한 것을 ‘원천’과 ‘과정’, 그리고 ‘경제성’이라는 세 가지로 추려보았습니다.
‘원천’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사실 개미는 인류의 조상이다!”라는 말을 하고서 그 근거로 사이비 과학 서적이나 컬트 커뮤니티의 짜깁기한 게시물, ‘조작된’ 증언 등을 든다면, 아무리 수많은 각주가 붙었다고 해도 엉망진창일 뿐입니다. 예시로 든 주장이 허무맹랑해서 그렇지, 실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는 게시물들 가운데, 주장에 대한 근거가 이 정도 수준에조차 못 미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근거들은 대체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울타리’ 바깥을 넘어가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타리를 견고하게 해주는 효과는 만점이기에,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엉뚱한 근거로 더욱 똘똘 뭉칩니다. 각주가 없는 경우보다도 나쁜 각주가 있는 경우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과정’은 ‘원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얘긴데요. 우리는 얼핏 ‘근거’와 ‘주장’의 관계가 눈에 명확히 보이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같은 책이나 기사를 보더라도 반응이 천차만별이고 또 같은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 역시 제각각인 것처럼, 자료를 참고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원천 자료뿐 아니라 그 자료를 바탕으로 어떻게 추론을 했는지 ‘과정’까지 투명하게 밝혀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저자는 이런 각주의 기능을 “건물의 설계도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성’에 대한 내용의 핵심은, ‘딱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적확하게 인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근거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만 랑케, 볼테르 등 역사가들은 ‘각주는 과유불급’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저자는 17세기 말 각주를 시도한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벨의 저서에 각주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해, 그의 글에는 “경제”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 글을 읽는 “독자는 박식의 늪 같은 데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인용에서 경제성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책이든 글이든 결국은 ‘대화’의 수단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만약 저와 둘리가 논쟁을 하는데, 제가 어떤 주장을 하고서 컨테이너 박스 하나 갖다주고선(읽는 데 걸리는 시간 2개월) 이게 근거니까 알아서 읽어보라고 한다면 다시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주장에 대해 수많은 근거를 줄줄이 이어 붙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 때문에 상대와 ‘진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선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겨냥하는 ‘경제성’ 역시 중요한 시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각주까지 포함해 ‘대화’니까요.
우리는 천재 로봇이 아니다 : 지식공동체
여기까지 각주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모든 개인이 일상적으로 어떤 논쟁, 주장을 보더라도 매번 ‘각주’를 파악하고 그 아래에 있는 진실성, 맥락까지 샅샅이 파악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실질적인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인지과학자 스티븐 슬로먼 등이 쓴 <지식의 착각>은 “당신은 지퍼의 작동 원리를 알고 있습니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하며 책을 시작합니다. 이런 특이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우리 개개인은 상상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이 때문에 개인의 지능을 과하게 믿는 대신 ‘지식공동체’에 제대로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저자는 ‘모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게 진짜 문제라고 주장하는데요. 자신의 무지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가 굉장히 많은 걸 통달하고 있다는 ‘지식의 착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한 실험에서 주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 검색을 해보게 했더니, 검색을 하기 전에 비해 자신감이 높아져 판돈을 크게 걸었고 더 큰 돈을 잃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손끝으로 클릭해서 전 세계의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 온갖 지식이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혐오, 오해, 불통의 문제는 이 같은 ‘지식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개인에게서 비롯됩니다.
저자는 ‘나는 아는 것이 없다’라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 외에도 ‘신뢰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중요한 ‘각주’들에 대해 과연 믿을 만한지, 어떤 주장에 대해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등을 대신 파악해주는 기관, 언론 등의 존재입니다.
맺음말
옛날부터 사람들은 눈앞에 명백한 증거를 가져다 대도 믿고 싶은 걸 믿었고,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문제들은 최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독특한 것이라기보다는, ‘믿고 싶은 마음’(개인)과 ‘대화하려는 마음’(사회)이 다퉈온 역사의 길 위에 있는 문제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술 규제도 필요하겠지만 ‘진짜’를 추구하기 위한 사회와 개인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주를 다루는 것, 그리고 때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선 의지할 만한 ‘지식공동체’를 가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와 ‘대화’가 사라진 시대를 헤쳐 나가는 첫걸음이지 않을까요?
1)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