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사는 게 아니고 ‘안’ 산다는, 미니멀한 환상

김지원 기자

가성비 시대의 안목

[인스피아] ‘못’ 사는 게 아니고 ‘안’ 산다는, 미니멀한 환상

‘무균실’ 같은 미니멀리즘 트렌드
물질적 욕망을 포기하는 상황을
‘세련됨’‘선함’ 등의 가치로 포장

다이소·이케아 등 가성비 소비는
안목 키워볼 생각조차 못하도록
물건을 쉽게 사고 버리게 만들어

값싼 노동력·환경오염 피하려면
주변 물건과 건강한 관계 맺어야

다이소가 올해 ‘3조 매출’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주방용품, 생필품, 화장품 등을 다이소에서 일상적으로 사게 됐습니다. “월급만 빼고 모두 오르는 시대”에 부담 없이 무엇이든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죠. 올해 겨울부턴 다이소에서 겨울용 플리스까지 판매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싸게 한철 입고서 버릴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인스피아] ‘못’ 사는 게 아니고 ‘안’ 산다는, 미니멀한 환상

미니멀리즘, 가성비의 시대입니다.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고 무던할수록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대량 생산 시대의 ‘가성비’에 맞춰 할인상품을 잘 먹고, 아무 물건이나 써도 별 불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대체로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씁니다. 무료로 받은 필기구도 많이 쓰고, 가구는 이케아에서 한번에 샀습니다. 저는 내심 그런 저의 성정을 기껍게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는 편이 돈도 자연히 절약되고,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가끔 이런 삶의 태도는, 그냥 테트리스처럼 맞는 자리에 꼭 박혀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나무토막처럼 만든 결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득 생각해보았습니다. 과연 이처럼 물건에 대한 안목 없이 가성비만 따지는 것이 내 삶에도 ‘긍정적’인 것일까. 주위에 10년 쓴 물건조차 찾아보기 힘든 나는, 삶을 빌린 것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단순한 열망>(카일 차이카),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윤광준) 등을 지팡이 삼아 미니멀리즘과 안목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삶 없는 집: 발 없는 새와 ‘이케아 미니멀리즘’

일본 작가 후지오카 미나미는 과거 독특한 미니멀리즘 실험에 도전했습니다. 100일 동안 아무것도 없는 하얀 ‘빈방’에 똑 떨어져, 하루에 물건 단 하나씩만을 얻는 실험이었죠. 통상 미니멀리즘이 잔뜩 쌓여 있는 데서 버려나간다면, 이 경우는 거꾸로 비어 있는 데서 하나씩 간절한 물건들을 얻는 방식입니다.

이 실험의 진짜 재밌는 부분은, 우선 이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점입니다. 속옷이나 휴지, 양말, 식재료 등 대부분의 ‘생필품’은 처음부터 ‘셈을 안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스트엔 의외로 가상현실(VR) 고글, 두반장 등 쓸데없는 것들도 등장합니다. 그는 “101개를 채우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는데요. 저는 이 실험이 ‘미니멀리즘 트렌드’에 대한 환상을 핵심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생활감이 지워지는 종류의 미니멀리즘입니다.

[인스피아] ‘못’ 사는 게 아니고 ‘안’ 산다는, 미니멀한 환상

<단순한 열망>은 예술평론가인 카일 차이카가 오늘날의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바라보는 책인데요. 저자는 오늘날 미니멀리즘 트렌드의 이미지(‘새하얀 무균실’)가 ‘허울’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은 결코 작품에서 ‘사람 냄새’를 죄 빼버리거나, 어수선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휴지통에 넣은 ‘무균실’을 만들자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열린 공간,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죠.

저자는 이 책에서 ‘상업적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크게 두 갈래에서 바라보는데요. ‘이케아 미니멀리즘’과 ‘사치재 미니멀리즘’으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케아 미니멀리즘이란 넉넉한 공간과 물질적 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도시민들이 이케아에서 산 ‘일회용 가구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을 일컫습니다. 어차피 금세 이사를 가야 하고, 비싸고 훌륭한 가구를 갖출 만한 공간도 없습니다. ‘발 없는 새’처럼, 머무른 온기와 취향을 남기지 않는 삶입니다. 저자인 카일 차이카 역시 처음 뉴욕으로 올라와 어쩔 수 없이 ‘강제된 미니멀리즘’을 실천해야만 했던 시기에 대해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새집을 구할 때마다 마치 금방이라도 떠나야 하는 사람이 머무는 호텔방처럼 꾸며놓고 살았다… 불황이 미니멀리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저자가 ‘불황’과 ‘미니멀리즘’이란 낯선 두 단어를 나란히 놓은 점이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통상 미니멀리즘은 인테리어 잡지 속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처럼만 여겨져왔기 때문이죠. 인테리어뿐 아니라 미니멀리즘 전도사들은 ‘정리’에 선(禪)이나 청교도적 도덕의 개념까지 부여했습니다. ‘더 많은 물건’은 마음의 흐트러짐을 보여주는 것이고, 탐욕이기 때문에 이를 죄다 버려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한번쯤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물욕을 가져본 적이 있긴 했는가’라는 지점에서요. 애초에 요즘 대부분의 도시 생활자들은 외부 환경, 이웃, 산책로, 주변 가게들과도 각별한 물질적, 정신적 관계(애착)를 맺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처럼 물질에 ‘초연한’ 태도는 짠테크 등의 추세와 이어지며 바람직하게 여겨지고요.

아끼는 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포기·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지나치게 미덕이라는 단어로 포장을 해온 게 아닌가 싶을 뿐입니다.

한편 ‘사치 미니멀리즘’은 조금 다른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커다란 공간을 낭비하며 마치 고급 호텔처럼, 삶의 느낌이 없도록 ‘무균실’처럼 꾸며놓는 것이 사치스러운 미니멀리즘 공간의 특징인데요. 이런 곳은 ‘미니멀리즘’이라곤 하지만, 실은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을 밀어내는 공간입니다.

사치스러운 미니멀리즘이든, 이케아식 미니멀리즘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물건은 ‘악’이며, 인간의 삶이라든지 각별한 취향이 깃들 여유가 없다는 점이죠. 최소한의 집기만을 둔 집 안에서 잡동사니는 눈에 거슬리는 순간 ‘사라져야’ 하므로, 다이소에서 산 값싼 물건들-우리가 정을 줄 필요도 없고 언제든 버리면 되는-이 벽장이나 하얀 문갑 속 어딘가에서 버려지기 전까지 조용히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생활명품’과 안목, 나만의 안목 가지기

몇년 전 한창 ‘금수저 플렉스’가 유행이었을 때, 우연히 한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된 콘텐츠는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멋진 옷이나 가구, 향수, 만년필, 술 등을 구입하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꽤 흥미로운 댓글을 보았습니다. “안목을 대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저 중에 하나 사볼까 말까겠지만요….” 저는 그 댓글을 읽고 ‘안목을 대신 키워줄 수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어서 어쩌면 그 댓글에서의 ‘안목’이란 말의 쓰임새야말로, 우리가 평소 안목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마치 초고급, 비싼 명품에만 붙일 수 있는 거룩한 무언가처럼요. 이 때문에 좀처럼 우리가 스스로의 삶 차원에서 안목을 넓혀볼 다짐은 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인스피아] ‘못’ 사는 게 아니고 ‘안’ 산다는, 미니멀한 환상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은 ‘생활명품’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지난 20년간 이를 대중에게 소개해온 사진작가 윤광준이 선정한 ‘물건’들을 모은 신간입니다. 즉 이 책은 저자 본인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101가지 ‘생활명품’이 무엇인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죠. 왠지 ‘생활명품’ 하면 ‘명품’이라는 단어 때문에 비싼 고급품들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보다도 생활명품이란 ‘만든 사람의 고집과 성의가 느껴지는, 소박하고 쓸수록 손에 딱 맞는 물건-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딱 자기 역할만을 잘하는 여행용 도어스토퍼, 아날로그 계산기, 오래 쥐어도 편안한 가위 등을 예로 드는데요. 이런 물건은 대체로 물건에 집요한 고집을 지닌 장인들이 열성을 다해, 철저히 쓰는 사람 입장에서 만든 것입니다. 이런 물건들은 쓸데없는 화려함과 불필요한 기능을 없애 가장 소박하고 단단하게 만든 것이죠. 저자에 따르면 “이 정도면 됐겠지”를 넘어 “이 정도는 돼야지”의 차원으로 넘어간 물건입니다. 이어 101가지 제품은 반드시 본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저자는 아찔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살면서 쓰지 않을수록 좋”은 응급용 토치를 차에 반드시 구비해두는데요. 이는 그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눈에 들어오기 어려웠을 물건이겠죠.

이처럼 ‘안목’은 내게 다가오는 감동 및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수준과 삶의 궤적에 맞게 스스로 발굴해내야 합니다. 저자는 안목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알기 위해선 하나하나 써보는 수밖에 없다”며 “경험으로 얻게 된 깨달음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절로 구분한다. 지녀야 할 물건과 버려야 할 물건도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즉 직접 자신이 써보고 시간을 들여봐야 자신의 안목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안목이란 결국 ‘거저’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안목’의 핵심은 결국 내가 어떤 물건과 각별한 관계를 맺겠다는 각오 그리고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서 쓰고 쉽게 버릴 수 있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물건과 관계 맺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굳이 ‘쓸데없는’ 안목을 키울 필요도, 물건을 귀중히 여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맺음말

‘미니멀리즘’과 ‘다이소’라는 두 단어는 얼핏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 ‘물건’의 중요성과 의미를 지운다는 차원에서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은 물건 그 자체를 없앰으로써, 한쪽은 우리가 물건을 아주 싼 값에 무한정 누릴 수 있으며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어찌됐든 살아가기 위해, 물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물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갖지 못한 즐거움에 대해 쉽게 단념하게 하면서, 우리 삶에서 물건이 갖는 가치를 제대로 궁리해볼 기회조차 앗아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저렴한 값으로 사고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엔 제값이 매겨져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죠. 웬디 A 윌러슨은 18세기 이후 산업화로 인한 ‘대량 생산 싸구려’의 역사를 그린 책 <싸구려의 힘>에서 “저렴해 보이는 물건들의 실제 비용을 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수세기간 싸구려의 대량 생산과 폐기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은 제3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환경오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래 ‘평균실종 시대’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적당한 값’의 상품은 사라지고, 아주 싼 것 혹은 아주 비싼 것으로 양극화되어간다는 것이죠. ‘짠테크’(미니멀리즘)와 ‘플렉스’로요. ‘평균실종 시대’라는 말에 대해 곰곰 해찰해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평소 일상에서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물건과 함께 살면서’ 나만의 안목을 계발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대신 가끔 남의 안목을 빌려 ‘무리해서 플렉스’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얻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질문은 이어집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방식의 소비를 통해, 물건과 건강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당장 ‘나무토막’ 같은 삶에서 벗어나긴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평소 어떻게 나의 주변 물건들과 관계 맺을지를 조금씩 고민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결국 저 자신의 삶뿐 아니라 전체 생태계를 이롭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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