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박세은, "발레슈즈 하루이틀만에 갈아 치우죠...불씨가 꺼지면 무용수는 끝"

유정인 기자
파리오페라발레단 제1무용수이자 지난해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박세은 발레리나가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습실에서 ‘르 프리미에 갈라’에서 선보일 <에스메랄다>를 연습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파리오페라발레단 제1무용수이자 지난해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박세은 발레리나가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습실에서 ‘르 프리미에 갈라’에서 선보일 <에스메랄다>를 연습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트로피요? 집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어요. 큰 힘을 준 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경력 한 줄이죠. 그것만 바라볼 수는 없어요.”

사람들이 빛나는 성취를 말하는 동안에도 무용수는 계속 움직였다. 트로피에 쌓이는 먼지만큼, 발레슈즈를 갈아치웠다. 음악과 몸짓과 마음이 완벽히 하나가 되는 순간의 쾌감이 그를 계속 춤추게 했다.

발레리나 박세은(30)을 말할 때 꼭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다. ‘무용계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2018년 세계 무용인들의 꿈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은 뒤 붙은 것이다. 정작 자신은 “제가 해야 할 역할들에 충실히 임하다보면 수상 이후의 변화를 느낄 시간은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지난 2일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박세은을 만났다. 지난 달 말 프랑스에서 귀국한 그는 오는 10~11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르 프리미에 갈라’ 무대에 오르기 위해 한창 연습중이었다.

올해로 발레를 한 지 꼭 20년이다. 10살 때 발레를 시작해 각종 국제 콩쿠르를 석권하고, 2011년 세계 최정상급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해 제1무용수에 오르기까지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과 춤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20년동안 발레를 했고, 앞으로 10년 정도가 더 남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서야 편안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테크닉과 라인(발레로 표현하는 몸의 선)보다도, 음악이 저에게 주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음악 안에서 몸과 표정으로 선율을 표현하는 것이요. 20대 때에 비해서 음악과 하나가 되는 부분이 성장한 것 같습니다.”

‘르 프리미에 갈라’를 통해 국내 팬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박세은 발레리나는 지난 2일 경향신문과 만나 무용수로서 계속 움직이게 하는 자기 안의 ‘불씨’에 대해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르 프리미에 갈라’를 통해 국내 팬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박세은 발레리나는 지난 2일 경향신문과 만나 무용수로서 계속 움직이게 하는 자기 안의 ‘불씨’에 대해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어려운 순간들이 없지 않았다. 2015년은 특히 그랬다. 예술감독이 바뀌면서 맡는 역할이 줄고, 연습 중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까지 찾아왔다. ‘춤을 추지 않으면 무용수들은 길을 잃는다’던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말이 마음에 와서 박혔다. “그 때 많이 힘들었어요. 왜 춤을 추는가, 수 많은 물음표들이 생기고 길을 잃은 것 같았어요. 그런데 결국 뭐가 없을 때도 뭔가를 해야만 하는 거에요.”

그런 순간에조차 무용수를 계속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엉뷔(envie)’라는 단어를 꺼냈다. 불어로 욕구, 갈망을 뜻하는 말이다. “불씨가 꺼져있으면 무용수는 죽는 거에요. 뭔가가 타서 나를 움직이게 해야 해요. 저의 불씨를 살아있게 하는 것 중 하나는 테크닉이에요. 아직도 테크닉을 놓지 않는 이유는 이걸 해낸 순간 춤이 자유로워지고, 오히려 해방되기 때문이에요. 나이가 들어가도 이 불씨는 계속 살아있어야 해요.”

사실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기 직전 시기도 ‘극복’해야 할 것을 마주한 때였다. 아시아계 발레리나로서 ‘타고나지 못한 것’과 ‘타고 난 것’을 견주며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세계 어느 연습실에선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신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아요. 노력으로 몸 자체가 변형되진 않아요. 저도 제가 가진 단점을 변화시킬 순 없죠. 이걸 우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자꾸 단점을 커버하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장점을 끄집어 내려 하면 단점이 잘 안보이거든요. 저희 발레단에 150여명 되는 무용수가 있어요. 신체조건이 유리한 친구들만 캐스팅되는 게 아니에요. 예쁘고 긴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끄집어 내야 하는지,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사실 가장 중요한 거죠.”

춤이 왜 아름다운가.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 발레리나는 춤이 가진 ‘치유’의 미를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춤이 왜 아름다운가.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 발레리나는 춤이 가진 ‘치유’의 미를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지난 20년간의 무대에서 가장 의미깊었던 것으론 <백조의 호수>와 <오네긴>을 꼽았다. 앞으로는 <지젤>과 <돈키호테> 주역을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번 갈라 무대에선 <백조의 호수>의 ‘백조 파드되’와 <에스메랄다>의 ‘그랑 파드되’를 선보인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중인 최영규(29)와 함께 한다.

“영규씨는 중학교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이번에 15년만에 함께 춤을 춰요. 멋지게 성장을 해서 재미있게 연습하고 있어요. 제가 시간 날 때 네덜란드나 영국에 무용 공연을 보러가는데, 네덜란드에서도 만났어요. 수석무용수로서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 컴퍼니의 이름을 내걸만한 스타라고 느껴져서 저도 기대가 큽니다.”

갈라에선 박세은과 함께 활동하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아망딘 알비숑과 오드릭 베자르가 <르 파르크(Le Parc·공원)>의 ‘파드되’를 선보인다. 그는 “발레단에서 제가 첫 눈에 반했던 친구들이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을 들고 온다”고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춤이 왜 아름다운지’를 물었다. 20년간 선율을 몸짓으로 그려내면서 때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발레리나의 대답은 이랬다. “마음 부대끼는 일이 있어도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어요. 다른 세계 속에 제가 공존하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을 치유해주고, 좀 더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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