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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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팔순을 맞은 배우 박정자씨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늘 어색하다”고 말했다.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려 하자 손까지 내저으며 “궁금하지만 안 보겠다”고 했다. 주로 캐릭터가 강한 역할로 무대에 서왔고, 중저음의 목소리 또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이지만, 이럴 때는 수줍음 많은 소녀 같다. 연극이라는 외길 인생을 살아온 그는 “이제부터 하는 작품은 덤, 보너스”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여전히 ‘작성 중’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올해 팔순을 맞은 배우 박정자씨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늘 어색하다”고 말했다.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려 하자 손까지 내저으며 “궁금하지만 안 보겠다”고 했다. 주로 캐릭터가 강한 역할로 무대에 서왔고, 중저음의 목소리 또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이지만, 이럴 때는 수줍음 많은 소녀 같다. 연극이라는 외길 인생을 살아온 그는 “이제부터 하는 작품은 덤, 보너스”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여전히 ‘작성 중’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박정자’ 없는 한국 연극사는 존재할 수 없다. 만삭일 때도 그는 무대에 있었다. 60년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출연한 작품이 160여편. 노파로, 무녀로, 왕비로, 어머니로…, 수많은 인물을 살았다. 무대는 뜨거웠고 객석의 여운은 자주 길었다.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예술상, 이해랑연극상 등 다수의 수상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라는 영예는 오히려 곁가지다.

그는 올해 한국나이로 80이 됐다. 여전히 현역으로 무대를 펄펄 날아다닌다. 오는 8월31일 한국에서 3번째 개막하는 라이선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신시컴퍼니 제작)에 주인공 빌리의 할머니로 출연한다. 그에 앞서 오는 31일엔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노래처럼 말해줘>도 공연한다. 지난해 2월 초연한 1인극으로 이른바 ‘박정자 배우론’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지난 18일 서울 마포의 한 건축사무소 공간에서 박정자씨를 만났다. 헤어스타일을 좀 손봤을 뿐, 화장기 전혀 없는 말간 얼굴의 그는 예의 중저음의 명징한 목소리로, 그러나 작고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는 8월31일 한국에서 3번째 개막하는 라이선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박정자씨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주인공 빌리의 할머니로 출연한다. 2017년에 이어 두 번째 출연이다. 사진은 2017년 공연의 한 장면. 신시컴퍼니 제공

오는 8월31일 한국에서 3번째 개막하는 라이선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박정자씨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주인공 빌리의 할머니로 출연한다. 2017년에 이어 두 번째 출연이다. 사진은 2017년 공연의 한 장면. 신시컴퍼니 제공

‘해롤드와 모드 80세까지 공연’
그 약속은 지난 5월에 지켰고
자전적 얘기 ‘노래처럼…’도 해
내가 할 거는 이미 다한 셈
‘빌리 엘리어트’부터는 보너스

- <노래처럼 말해줘>는 지난 시즌과 같은 내용인가요.

“좀 달라요. 지난 시즌 공연에서 3대목을 가져오고 노래를 4곡 부르는데, 지난 시즌에는 없던 토크를 하거든요. 극중 출연자가 제게 질문을 해요.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객 대신 묻는 거죠.”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도 맹연습 중인 것으로 알아요.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야 하는 빌리의 ‘치매 할머니’ 역으로 출연하는데, 힘에 부치진 않는가요.

“왜 힘들어요? 너무 즐겁지. 전 몸치 아니에요(웃음). 진명학교 시절 무용부에 속해 한국무용을 한 걸요.”(그는 현 중·고교에 해당하는 서울 효자동 부근 진명학교에 다니던 6년간 무용부뿐만 아니라 웅변부, 합창부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연극반이 없어 서운했다지만 모두 무대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훗날 그가 배우생활을 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

<빌리 엘리어트>는 2010년 국내 초연한 라이선스 뮤지컬이다. 7년 만인 2017년 다시 한국 공연이 이뤄졌고, 그로부터 4년 만인 오는 8월31일 서울 구로구 대성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귀환 무대가 시작된다. 탄광촌에 사는 11살 소년 빌리가 우연히 발레를 접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꿈을 이뤄가는 여정을 유쾌하고 따뜻한 감성으로 그린 작품이다. 박씨는 4년 전 오디션을 통해 할머니 역을 따냈다.

- 한국 연극계의 대모 격인데 오디션 보는 게 자존심 상하진 않았습니까.

“신시컴퍼니가 ‘선생님은 오디션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어느 날 원제작사인 영국의 유니버설픽처스 스태프들과의 상견례 자리에 나오라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연출자가 제게 이것저것 묻더니, 갑자기 A4 용지 한 장짜리 대본을 내밀면서 읽어보래요. ‘아이구 그래,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생각하곤 대사를 쳤죠. 그러자 할머니 배역 캐스팅이 난항이었는데, 너무나 좋은 배우를 만나서 반갑고 기쁘다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OK!’ 하고 나왔죠(웃음).”

박정자씨는 늙어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비도 맞고, 눈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는데 그 길을 다시 돌아간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철훈 선임기자

박정자씨는 늙어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비도 맞고, 눈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는데 그 길을 다시 돌아간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철훈 선임기자

- 올해 팔순을 맞았어요. 여배우에게 80은 어떤 느낌인가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그냥, 아,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안도의 느낌이 들었어요.”

- 안도라고요.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거든요. 시어머님은 내 나이 전에 그리고 친정어머니는 84세에 돌아가셨어요. 그걸 생각하면, 이제 나도 얼마 안 남았다 싶어요. 그런데 그게 전혀 불편하거나 슬프지 않아요. 외려 그래,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지 싶죠. 연극 <해롤드와 모드>를 80세까지 하겠다는 약속을 지난 5월에 지켰고, 제 자전적 얘기인 <노래처럼 말해줘>도 했으니 할 거 다했어요. <빌리 엘리어트>부터는 덤, 보너스라 생각해요. 감사한 일이에요.”

- 늙음에 대한 거부감이 없군요.

“시간의 흐름을 거부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주름과 흰머리가 생기고 눈과 귀가 나빠지고, 하하하…. 최근에 저도 청력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제 아들이 저더러 보청기를 끼어야 한다고 해요. 무릎이 아파서 주사 맞아야 하는 것 외엔 그래도 건강하니까 감사해요. 저는 늙는 게 좋아요. 젊은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 왜요.

“젊은 시절엔 그 나이만큼 어설펐지만 열심히 살아왔으면 된 거니까요. 비도 맞고, 눈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는데 그 길을 다시 돌아간다? 전혀 의미 없어요.”

1966년 3월 극단 자유의 창단했다. 박정자씨도 참여해 창단 첫 작품으로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따라지의 향연>을 공연했다. 사진은 공연이 끝난 후 박씨가 무대 뒤에서 극단 자유의 대표 이병복씨와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정자와 한국 연극 50년> 제공.

1966년 3월 극단 자유의 창단했다. 박정자씨도 참여해 창단 첫 작품으로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따라지의 향연>을 공연했다. 사진은 공연이 끝난 후 박씨가 무대 뒤에서 극단 자유의 대표 이병복씨와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정자와 한국 연극 50년> 제공.

그는 1962년부터 연극무대에 섰다. 생애 처음 연극이라는 우주에 눈뜨게 한 작품은 1950년 4월30일에 본 유치진 극본의 <원술랑>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으로,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당시 부민관(현 한국프레스센터 건물 맞은편)에 문을 연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 ‘신협’에 연구생으로 들어간 스무 살의 큰오빠 박상호씨(1931~2006)로 인해 보게 된 작품이었다. 황홀했던 그날의 공연은 그의 가슴 깊숙이 오롯이 각인됐다.

- 배우로서 첫발을 뗀 것은 이화여대 신문학과 2학년 때인 1962년이었죠.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의 <페드라> 오디션에 응시하면서라고요.

“저는 제가 당연히 주인공 페드라로 선발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대사라고는 열여섯 마디가 고작인 시녀 파노프 역에 캐스팅됐죠. 자만했는데 무대에 서자 몸이 굳어버렸고, 급기야 마지막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러 연출자에게 꾸중을 들었어요. 그로부터 37년 후인 1999년 극단 자유의 <페드라> 공연에서 비로소 페드라를 연기했어요.”

1999년의 <페드라>. 1962년 시녀를 맡았던 그가 주인공 페드라를 연기했다.  박정자씨 제공

1999년의 <페드라>. 1962년 시녀를 맡았던 그가 주인공 페드라를 연기했다. 박정자씨 제공

60년간 한 해도 안 거르고 무대
160편 속 나를 넘어 타인의 삶
지금도 무대 오르기 전 많이 떨어

-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서며 약 160편의 작품에 출연했어요. 연극이 왜 좋습니까.

“나를 넘어서 작품 속으로 들어가 타인의 삶을 살며 그것을 관객들과 나누는 게 좋아요. 저는 지금도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감 때문에 많이 떨어요.”

- 거의 외도 없이 연극인으로 산 삶, 어떻게 자평하나요.

“선택을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오빠의 영향이 컸죠. 어려서부터 극장을 숱하게 드나들며 <마의태자> <햄릿> 등 수많은 작품을 섭렵했으니까요. 나이는 어려도 연극으로 꽉 찬 제 머리는 이미 어른이 돼 있었어요. 그런 경험이 제가 올곧게 연극으로 가는 길을, 기회를 열어준 거예요.”

- 회한이나 아쉬움은 없습니까.

“(단호한 목소리로) 없어요.”

1969년 출연한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 원작의 <대머리 여가수>. 손수건을 들고 연기하는 이가 박정자씨다. <박정자와 한국 연극 50년> 제공

1969년 출연한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 원작의 <대머리 여가수>. 손수건을 들고 연기하는 이가 박정자씨다. <박정자와 한국 연극 50년> 제공

연기도 연기지만 중저음에 카리스마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다. “그건 엄연한 범죄입니다. 새로운 가족 희비극. 기생충 아-하.”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예고편에서 목소리만으로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드러내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한국어 더빙판에선 문어마녀 ‘우르술라’ 목소리 연기를 했다.

- 대학교 3학년 때인 1963년 동아방송 개국과 함께 모집한 성우 1기생으로 합격하며 대학을 그만뒀어요. 왜 성우를 선택했나요.

“연기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때는 TV가 집집마다 있지도 않아 라디오가 최고였거든요. 사미자·전원주·김무생씨 등이 동기였고, 장민호·나옥주씨 같은 연극배우들도 라디오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어요. 대학을 그만둔 건 대학이 방송 출연을 금지했고 동아방송도 학업을 계속하는 데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에요. 2004년 이화여대에서 명예졸업장을 주셨지만요.”

- 성우는 언제까지 했습니까.

“전속기간이 있었으니까 한 4년 했나? 하지만 내레이션은 꾸준히 했어요.”

- 목소리가 큰 자산인 것 같아요.

“최근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내년에 출시되는 넥슨의 게임에서 여자 사령관 목소리 연기를 했거든요. 좋아라, 했죠. 아르바이트니까요. 연극하면 돈을 못 벌어요. 작년 <노래처럼 말해줘>나 5월에 한 <해롤드와 모드>는 아예 출연료를 안 받겠다고 했어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힘든 제작팀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대신 <해롤드와 모드>는 티켓으로 달라고 했어요. 제 공연으로 팔순잔치를 성대히 벌인 거예요(웃음).”

1963년 동아방송 전속 성우 1기생으로 방송·영화부문 기대주로 뽑힌 합격자들. 당시 성우 1기 모집에는 2400명이 지원해 8차례의 시험을 거쳐 24명을 뽑아  10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맨 앞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정임, 김희준, 성재희, 고은아, 강부자, 사미자, 박정자.  박정자씨 제공

1963년 동아방송 전속 성우 1기생으로 방송·영화부문 기대주로 뽑힌 합격자들. 당시 성우 1기 모집에는 2400명이 지원해 8차례의 시험을 거쳐 24명을 뽑아 10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맨 앞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정임, 김희준, 성재희, 고은아, 강부자, 사미자, 박정자. 박정자씨 제공

- 벌이를 생각했다면 TV나 영화에 더 자주 출연할 수도 있지 않나요.

“TV는 안 해요. 제가 TV 연기를 못해요. 안 맞아요. 그냥 소모된다고 할까? 저는 하루 두 끼 먹으니 그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뭔가를 내려놓는 건 참 좋은 거예요. 3~4년 전부턴 제가 자동차 운전을 안 해요. 나 혼자 타는 차로 인해 매연과 교통체증이 더 인다고 생각하니 맘먹게 되더라고요.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몇년간은 지하철 실버패스카드도 안 썼어요. 세금 꼬박꼬박 잘 냈으니 이 나이엔 써도 되겠다 싶어 지금은 쓰고 있어요.”

- 영화 출연 편수도 많지는 않던데요(그는 김기영 감독의 <충녀>(1972),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와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5) 등에 출연했다. <육체의 약속>과 <자녀목>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래도 영화 연기는 좋아해요. <기생충> 예고편 녹음을 마치고 택시로 귀가하는데 외국에 출장가 있던 봉준호 감독이 국제전화를 걸어왔어요. 내가 배우인데 왜 출연은 안 시키고 목소리만 가져가냐고 했더니, 잘 준비해서 모시겠다고 해요. 그러니 이 말은 꼭 써주세요. 봉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찍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역할이든 목소리 출연을 하고 싶다,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요. 하하하….”

광대패 우두머리 모가비 역을 맡았던 극단 자유의 <햄릿> 1993년. <박정자와 한국 연극 50년> 제공

광대패 우두머리 모가비 역을 맡았던 극단 자유의 <햄릿> 1993년. <박정자와 한국 연극 50년> 제공

- 박정자 하면 1990년대 화장품 CF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우방에서 살아요’ 카피로 유명한 우방 CF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요. ‘헬레나 루빈스타인’은 남편 이지송 감독의 작품이죠.

“남편이 제게 처음 제안한 CF였어요. 화장품 광고라길래, 내가 하면 목소리가 무서워 안 팔릴 거라고 했더니, 아니라는 거예요. 화장품 광고는 예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해야 한다는 통념을 제 남편이 깬 거죠. 대박을 쳤어요.”

이지송 감독은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후 1973년 광고계에 입문해 만보사, 연합광고, 세종문화, 제일기획 등에서 CF 감독으로 활동했다. 브라보콘, 영에이지. 가나초콜릿 등 당대 히트 CF 제조기였다. 스물일곱 살 때인 1972년 네 살 연상의 박씨와 결혼했다.

- 남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신문기자였던 친구가 강원도 최전방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동생 부대에 위문 공연을 가달라고 부탁했어요. 동생이 마침 휴가 나와 있으니 직접 만나 상의해 보라고요. 그래서 함께 공연 일정을 짰고 극단 자유의 동료인 추송웅, 함현진씨와 전방서 단막극 <우정>을 정성껏 공연했죠. 그 후로 휴가를 나오면 데이트했어요.”

- 연상연하 커플인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양가 다 반대했죠. 특히 친정어머니 반대가 심했어요. 사회에 나와 막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광고회사에 취직한 것도 저와 결혼하기 위해서였어요. 어머니가 남편의 직업 불안정성에 대한 불만이 컸거든요.”

박정자씨는 1972년 네 살 연하의 이지송씨와 결혼했다. 홍대 서양학과 출신인 남편 이씨는 CF 감독으로 1970년대 히트 CF를 다수 제작했다. 대중의 뇌리에 배우 박정자의 목소리로 강한 인상을 남긴 ‘헬레나 루빈스타인’ 광고도 그의 작품이다. 박정자씨 제공

박정자씨는 1972년 네 살 연하의 이지송씨와 결혼했다. 홍대 서양학과 출신인 남편 이씨는 CF 감독으로 1970년대 히트 CF를 다수 제작했다. 대중의 뇌리에 배우 박정자의 목소리로 강한 인상을 남긴 ‘헬레나 루빈스타인’ 광고도 그의 작품이다. 박정자씨 제공

- 배우 일을 하면서 살림과 육아(1남1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시어머니가 불만이 있으셨지만 제가 고집이 세서, 나는 내 길 간다였어요. 누구도 제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요. 시어머니는 엄하면서도 지혜로운 분이셨어요. 결혼 초 친척들이 ‘저 며느리 큰일 났다, 저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어떻게 하냐’ 했대요. 그러자 시어머니께서 ‘박정자가 시어머니 모시고 사냐? 내가 박정자 모시고 살지’ 하셨다더군요. 우리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늘에서 컸어요. 지금도 많이 그리워해요.”

그는 “저는 엄마로서 빵점, 며느리로서도 빵점, 아내로서도 빵점”이라고 말했다. ‘배우로선 100점 아니냐’고 했더니 “60점쯤?”이라며 스스로 박하게 평가했다. 연기를 향한 끝없는 갈증 때문일 것이다.

- 남편은 일하는 아내를 지지했나요. 

“그럼요. 우리 부부는 서로 독립적이에요. 남편의 월급으로 몇년 살아본 것 외엔 남편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살림에 필요한 돈도 제가 댔고요.”

- 남편이 유명 CF 감독이었는데요.

“그 사람이나 저나 경제관념이 없어요. CF회사도 차리고 벌긴 되게 잘 벌었는데 경영엔 젬병이었거든요. 그래도 전 바가지 한 번 긁어본 적 없어요. 친정어머니도 늘 그러셨어요. 남편 돈 바라는 것만큼 치사한 것 없다고(웃음).”

- 연극 포기하고 싶은 때는 없었습니까.

“잠깐씩 생각한 적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나는 연극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박정자씨는 자신의 인생 롤모델이 <해롤드와 모드>의 ‘모드’라고 말해왔다. “무소유, 무공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3년부터 이 작품을 해온 그는 극중 모드와 나이와 같은 80세가 될 때까지만 이 작품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지난 5월 마지막으로 모드가 되어 관객을 만났다.

박정자씨는 자신의 인생 롤모델이 <해롤드와 모드>의 ‘모드’라고 말해왔다. “무소유, 무공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3년부터 이 작품을 해온 그는 극중 모드와 나이와 같은 80세가 될 때까지만 이 작품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지난 5월 마지막으로 모드가 되어 관객을 만났다.

나의 롤모델은 무소유의 ‘모드’
그는 80세 생일에 스스로 생 마감
난 어떻게 떠날까 숙제에 부러움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 롤모델이 <해롤드와 모드>의 ‘모드’라고 말해왔다. 자살을 생각하는 19세 소년 해롤드가 80세 노인 모드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왜 모드가 롤모델인지 물었다. “무소유, 무공해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모드는 아무것도 소유한 게 없어요. 사는 집, 갖고 있는 물건 모두 남이 쓰다 버린 거예요. 그리고 80 생일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잖아요.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에요. 저 역시 어떤 것으로도 공해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물론 먹어야 하고 버릴 수밖에 없지만 웬만하면 쓰레기를 안 만들려 하고 분리수거도 철저히 해요. 집에 가구도 거의 없어요. 다만 모드가 몹시 부러운 건 이제 제가 80인데 어떻게 떠나야 하는가 하는 숙제 때문이죠(웃음).”

-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나봅니다.

“한복 하는 친구가 제 수의도 만들어줬어요. 제가 화려한 걸 싫어해 소재는 실크지만 모양도, 가짓수도 심플하게 제작해줬죠. 제 것만 하니까 남편에게 미안해 남편 수의는 제가 돈 주고 주문했어요. 남편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에요. 실크도 싫어해 무명으로 만들었죠. 시어머니도 생전에 그렇게 준비해두셨어요.”

- 그 이후에 대한 계획도 있습니까.

“저는 의자로 남고 싶어요. 의자 뒤편에 연극배우 박정자 그리고 정말 좋은 대사 한 줄을 새겨넣은 그런 의자를 만들어 기증할 생각이에요.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 쉬어갈 수 있게요. 나무의자였으면 하는데, 오랜 시간을 바라지 않고 몇년 동안만 비바람을 견딜 수 있으면 되겠다고 생각해요. 그 옆엔 제가 좋아하는 수수꽃다리(라일락) 나무를 심고요. 저를 화장해 나온 뼛가루 중 일부를 그 나무 밑에 뿌려주면 좋겠어요.”

그는 수수꽃다리 이야기를 하면서 그 향에 취하기라도 한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박정자라는 이름의 거장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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