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벌하는 디스토피아, 넷플릭스 ‘지옥’

오경민 기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1~3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흉악범이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는다. 범행 당시 술을 먹었다는 이유로 감형을 받는다. 촉법소년이라 형사처벌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인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형사사법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추이’를 보면 국민 중 절반 이상이 경찰, 검찰, 법원 등 사법기관을 믿지 않는다. 시민들이 보기에는 죄를 지은 이가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진 사회가 된 셈이다.

오는 19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속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형사 진경훈(양익준)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은 당시 마약에 취한 상태였다는 이유로 치료감호를 받다 6년 만에 출소한다. 그 뒤 어느 날,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지옥행을 선고하기 시작한다. 고지한 시간이 되면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을 무자비하게 불태워 죽인다.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는 이를 두고 신의 경고라고 설파한다. 죄를 지어도 제대로 벌주지 않는 세상에 신이 불만을 가지고 직접 정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진리회는 죄를 새롭게 정의하고, 이 해석은 새 세상의 교리가 된다. 스스로를 ‘화살촉’이라고 칭하는 몇몇은 신의 뜻을 실현하겠다며 직접 죄인들을 단죄하기에 이른다.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 지옥행을 고지하면, 예정된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고지받은 사람을 고문하다 불태워 죽인다. 넷플릭스 제공.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 지옥행을 고지하면, 예정된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고지받은 사람을 고문하다 불태워 죽인다. 넷플릭스 제공.

사람들이 박정자(김신록)에 대한 ‘시연’을 구경하기 위해 박정자의 집 앞에 모인다. 어떤 이들은 돈을 내고 ‘VIP석’에서 이를 관람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제공.

사람들이 박정자(김신록)에 대한 ‘시연’을 구경하기 위해 박정자의 집 앞에 모인다. 어떤 이들은 돈을 내고 ‘VIP석’에서 이를 관람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제공.

그러나 이 지옥행 선고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다. 지옥행은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 사람을 재로 만드는 신비한 형식을 띠었을 뿐, 지진이나 화산 폭발과 다르지 않은 ‘재난’이다. 감독이 구현한 초자연적 존재는 장난처럼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방치한다. 감독은 언뜻 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그가 주목하는 것은 신의 존재 여부나 정당성보다는 신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행동이다.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장면들을 보다 보면 영화화된 만화 <데스노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죄지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시민들이 공포를 느껴 스스로 행위를 검열하게 된다는 설정이 비슷하다. 연상호 감독은 여기에 장치를 추가한다. 인간이 신을 이용해 자신의 단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데스노트>의 주인공 라이토가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면, <지옥>의 새진리회 사제들은 신의 영역이 공고해질수록 힘을 얻는다. 무작위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초자연 현상을 ‘시연(試演)’이라 부르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감독은 신의 의도에 대한 해석을 특정한 사람들이 독점할 때 어떤 세상이 펼쳐지는지 보여준다. 인간을 벌하는 규율에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고, 맹목적 믿음을 행동에 옮기는 이들이 많아진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그린다.

지옥행보다 무서운 것은 죄를 지었다는 낙인이다. 광신도 집단인 화살촉은 지옥행을 고지받은 이들을 찾아가 가족의 신상을 털고, 죄를 실토하라며 사적 처벌을 가한다. 신의 뜻을 부정하는 것으로 지목된 이들은 고지와 상관없이 인민재판을 받기도 한다. 고지를 받은 박정자(김신록)의 아이들 역시 얼굴과 나이 등이 화살촉 인터넷 방송을 통해 공개된다. 아이들이 한국을 탈출하는 과정은, 시연 이전에 괴물들이 달려오는 장면보다 더 위기로 느껴진다. 화살촉 방송을 보는 이들은 근거 없이 박정자의 죄를 추측한다. 남편을 죽였을 것이다, 아이들을 학대했을 것이다, 불륜을 저질렀을 것이다. 신은 아무런 의도가 없지만 화살촉은 신의 의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고는 자신들은 신이 날린 화살이라고 합리화한다.

새진리회 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화살촉 리더 이동욱(김도윤)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죄인’들의 신상을 털고 추종자들과 교류한다. 넷플릭스 제공.

새진리회 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화살촉 리더 이동욱(김도윤)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죄인’들의 신상을 털고 추종자들과 교류한다. 넷플릭스 제공.

신의 뜻을 행한다고 믿는 화살촉은 새진리회에 반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괴롭히고 고문한다. 넷플릭스 제공.

신의 뜻을 행한다고 믿는 화살촉은 새진리회에 반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괴롭히고 고문한다. 넷플릭스 제공.

<지옥>은 연상호 감독이 최규석 작가와 함께 제작한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웹툰과 몇 가지 설정이 달라진 점이 있다. 진경훈 형사의 아들 성호는 희정이라는 이름의 딸로 바뀌었다. 배우 이레가 연기했다. 새진리회 초대 의장 정진수(유아인)는 더 소박해졌다. 웹툰에서는 다세대주택에 살지만 드라마에서는 단칸 고시원에 살고 있다. 지옥의 사자들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은 더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연출된다. 시연을 더욱 신의 심판처럼 보이게 했다.

지난해 말, 아동 성폭행 혐의로 12년을 복역한 조두순(68)이 만기 출소하자 그의 집 앞은 그를 직접 응징해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이들로 붐볐다. <지옥>은 이들이 말하는 정의가 구현된 세상을 그린다. 원작 웹툰에서 진경훈의 아들이 자신의 엄마를 죽인 살인범을 화장터에서 산 채로 태워죽이는 에피소드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조두순도 저렇게 산 채로 태워죽여야 하는데.” 이 댓글은 2738개의 동의를 얻었다. 감독은 하나의 정의가 진리가 되는 세상을 비관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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