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제빵사와 중국인 노동자의 우정...‘퍼스트 카우’

백승찬 기자

개척시대 초반기였던 1820년대 미국 서부, 한 무리의 모피 사냥꾼들이 숲 속을 이동중이다.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유대인 쿠키(존 마가로)는 숲에서 헐벗은 채 누군가에게 쫓기던 중국인 노동자 킹 루(오리온 리)를 도와준다. 몇 년 뒤 둘은 한 마을에서 재회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거주하기 시작한다. 쿠키는 우유를 넣은 빵을 만들어 팔고 싶어하지만, 이들에겐 우유가 없다. 둘은 밤마다 마을에 한 마리 뿐인 암소를 몰래 찾아가 우유를 짜고, 그렇게 만든 빵은 큰 인기를 누린다. 암소 주인이자 마을 유지인 팩터(토비 존스)는 빵 맛에 반해 쿠키에게 파티용 디저트를 주문한다. 쿠키와 킹 루는 다시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암소를 찾는다.

영화 <퍼스트 카우>의 시대배경이나 설정만 보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오스카 감독상 수상작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떠오른다. 하지만 <퍼스트 카우>엔 <레버넌트>와 같은 살육과 추격전, 복수극이 없다. 줄거리만 보면 조금 더 스릴을 줄 수도, 액션 장면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는다. 이질적인 환경에서 온 두 남자의 우정이 따스하게 그려질 뿐이다.

<퍼스트 카우>의 킹 루(오리온 리, 왼쪽)와 쿠키(존 마가로).  영화사 진진 제공

<퍼스트 카우>의 킹 루(오리온 리, 왼쪽)와 쿠키(존 마가로).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현대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 강변에서 한 소녀가 두 구의 유골을 발견한다. 유골들은 함께 묻힌 듯 나란히 누워있다. 관객에게 영화 시작부터 결말을 알려주는 셈이다. 유골만 보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 같지만, 영화는 마냥 느긋하게 진행된다. 객사한 사람은 통상 연민의 대상이겠지만, <퍼스트 카우>의 유골은 대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기라도 하는 듯 평화롭다.

초기 자본주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 쿠키와 킹 루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쿠키는 몰래 젖을 짜는 처지이면서도, 누구보다 따뜻하게 암소와 교감한다. 유대인과 중국인이 아무런 편견 없이 우정을 쌓는다. 미국 선주민 캐릭터도 등장하는데, 그들 고유 언어가 번역 없이 그대로 나온다. 자막을 제공하지 않아 불친절하다기보다는,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았던 당대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35㎜ 필름, 1.37:1 비율의 화면비로 촬영됐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프레임은 (집) 내부에서는 상당히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등장인물을 담아내는데도 적절한 방식”이라며 “장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대신 소박한 프레임”이라고 설명했다. 라이카트는 미니멀한 형식으로 노동자 계급 등 미국의 비주류 인물을 그려온 독립영화 감독이다. <퍼스트 카우>는 그의 일곱번째 장편 연출작이며, 그의 작품 중 국내 첫 정식 개봉작이다. 작지만 독창적이고, 담담하지만 오래 기억될 수작이다. 4일 개봉.

영화 <퍼스트 카우>에서 킹 루와 쿠키는 마을에 하나 뿐인 암소 젖을 짜 빵을 만들며 아슬아슬한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퍼스트 카우>에서 킹 루와 쿠키는 마을에 하나 뿐인 암소 젖을 짜 빵을 만들며 아슬아슬한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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