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인증번호 [240555]를 입력해주세요”가 시가 되는 시집, 성기완의 ‘11월’

김지혜 기자
음악가이자 시인인 성기완이 QR코드를 이용한 하이퍼링크로 음악, 영상, NFT 마켓 등으로 연결되는 멀티미디어 시집 <11월>을 출간했다. 이준헌 기자

음악가이자 시인인 성기완이 QR코드를 이용한 하이퍼링크로 음악, 영상, NFT 마켓 등으로 연결되는 멀티미디어 시집 <11월>을 출간했다. 이준헌 기자

“본인인증번호 [240555]를 입력해주세요.” “<script nonce=“rAand0m”> doWhatever(); </script>” “0kum01ba4c1d019d”

시집을 펼치면 기계어들이 쏟아진다. 스마트폰 또는 컴퓨터 화면을 이미 무수히 스쳐간, 그러나 해독할 수 없는 암호들이 출몰한다. 시들 속에 새겨진 12개의 QR코드는 이미지, 음악, 영상 심지어 NFT(대체불가토큰) 마켓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시와 음악, 기호들이 뒤섞인 성기완의 ‘멀티미디어 시집’ <11월> 얘기다.

<11월>은 추후 디지털 파일로 재가공돼 무료 배포된다. 성기완은 “현대 노동의 상징”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프로그램”인 엑셀을 통해, 하이퍼링크를 활용한 일정표 형식을 구현할 예정이라고 했다. 시인 제공

<11월>은 추후 디지털 파일로 재가공돼 무료 배포된다. 성기완은 “현대 노동의 상징”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프로그램”인 엑셀을 통해, 하이퍼링크를 활용한 일정표 형식을 구현할 예정이라고 했다. 시인 제공

제목에 부응하여, 시들은 10월31일부터 11월30일까지 한 달여간 매일을 기록한 스마트폰 일정표 형식으로 쓰였다. 메모와 감상과 대화, 하이퍼링크, 이미지를 비롯해 인증키, 비밀번호, 승인 문자, 해시값 등으로 범벅된 일정표의 모습이 고스란히 시가 됐다. 층위를 달리하는 언어들이 한데 섞여 독해가 쉽진 않다.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이 익숙한 낯섦을 견뎌보고 싶다. 우리 삶과 말의 풍경이 이토록 ‘멀티미디어’적이기 때문이리라.

“제가 시인인데, 시집은 안 보고 맨날 일정표만 들여다보고 있더라고요. 시인이 드러내야 할 우리 언어 생활에서 중요한 텍스트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매일 일정표만 보고 있는데 ‘사뿐히 즈려밟는’ 옛날 김소월처럼 멋있는 시만 쓸 수는 없죠.”

9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 <11월>을 출간한 성기완을 지난 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QR코드부터 블록체인까지 시의 자장을 넓힌 실험의 이유부터 물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시와 현실이 괴리되지 않는 솔직한 언어 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음악가이자 시인인 성기완이 QR코드를 이용한 하이퍼링크로 음악, 영상, NFT 마켓 등으로 연결되는 멀티미디어 시집 <11월>을 출간했다. 이준헌 기자

음악가이자 시인인 성기완이 QR코드를 이용한 하이퍼링크로 음악, 영상, NFT 마켓 등으로 연결되는 멀티미디어 시집 <11월>을 출간했다. 이준헌 기자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였고 지금은 밴드 트레봉봉을 이끄는 음악가이자 전위적 시인으로 꼽히는 그에게 실험은 낯설지 않다. 세 번째 시집 <당신의 텍스트>(2008)는 앨범 <당신의 노래>와 쌍을 이뤘고, 네 번째 시집 <리을>(2012)은 ‘노이즈 시’를 표방했다. 1998년 첫 시집을 낸 이후 매순간 “말의 여러 국면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한 결과다.

“11월은 블랙홀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과거와 현재의, 여기와 저기의/ 다시 말해 몽홀의/ 어른거리는 감정의 난수표들을/ 11월의 일정표 안에 표시한다.” 첫 시 ‘10월31일 일 10103776 259’는 <11월>이 하려는 바를 분명히 안내한다. 성기완은 스스로를 “국경에서 일하는 춥고 외로운 언어의 보초”라고 표현한다. 그는 어제와 오늘, 삶과 죽음 등 명확한 경계들이 아슴푸레 흐려지는 언어의 최전방(그는 이를 ‘몽홀’이라 표현했다)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 위해 보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쓴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일상을 장악했으나 제대로 사유되지 못한, 그리하여 여전히 시가 되지 못한 일정표의 언어에 주목했다. 각종 업무와 약속이 적히고, 동료들과 끊임없이 공유되며, 하이퍼링크로 계층화되는 일정표 속 기록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다시 보는 “시적 포렌식”을 시도했다. 그렇게 복원된 일상은, 뜻밖의 무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11월> 중 일부 시는 그래픽 시로 재가공돼 NFT 마켓에 등록된다. 예컨대 시 ‘은하銀河’는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로 디자인됐다. 시인 제공

<11월> 중 일부 시는 그래픽 시로 재가공돼 NFT 마켓에 등록된다. 예컨대 시 ‘은하銀河’는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로 디자인됐다. 시인 제공

<11월> 중 일부 시는 그래픽 시로 재가공돼 NFT 마켓에 등록된다. 시‘급여명세서’는 실제 쓰일 법한 공문 형식으로 디자인됐다. 시인 제공

<11월> 중 일부 시는 그래픽 시로 재가공돼 NFT 마켓에 등록된다. 시‘급여명세서’는 실제 쓰일 법한 공문 형식으로 디자인됐다. 시인 제공

“휴대폰으로 전송된 인증번호 여섯 자리를 입력하라는데 몇 번 실수를 한 적 있어요. 한시가 급한데 24시간 후에 다시 시도하라고 하더군요. 언어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무작위의 기호들이 내겐 너무 치명적인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우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기계어들이 치명적으로 작동하는 언어의 숲에 있어요. 사실 누구나 그래요. 기사 하나를 읽으려 해도, 원하는 텍스트보다 주위에 무의미한 광고의 비중이 더 큰 경우가 많잖아요. 대부분이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지만요.”

성기완은 “시그널이 시어보다 절박”한 세계를 봤다. 이곳에선 시 역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쓰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전적 형식으로 말하면 그건 고전적인 내용이 된다”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시들이 새로운 언어 형식들과 괴리를 빚고 있는 현실을 돌파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집을 열자마자 보이는 QR코드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밀면, <11월>을 위해 성기완이 직접 만든 곡 ‘11월 November’가 유튜브로 재생된다. 곡과 함께 그가 촬영한 타임랩스 영상이 흘러간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흘러가는 서울 연희동의 풍경이다. 같은 방식으로 총 6곡이 시집에 삽입됐다. 그 중 5곡을 엮은 미니앨범은 지난 26일 정식 발매돼 음원 사이트에서 감상이 가능하다. 일부 시는 그래픽 시로 재가공돼 NFT 마켓에 등록된다. 예컨대 시 ‘은하銀河’는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로, ‘급여명세서’는 실제 쓰일 법한 공문 형식으로 디자인됐다. 일상의 말들이 그렇듯, 시는 다양한 매체와 형식으로 뻗어간다.

“본인인증번호 [240555]를 입력해주세요”가 시가 되는 시집, 성기완의 ‘11월’

<11월>은 정말 혼란한 시집이다. 너무 혼란해 모른 체했던, 암호 같은 세상을 구태여 눈앞에 들이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살펴보면, 저 멀리 암스테르담에서 가까이는 제주에서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며 죽이는 여러 인간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시집이 낯설어 보이는 형식을 타고 도착하는 곳은 결국 사랑하고 미워하는, 보편의 감정이다. <11월>은 추후 디지털 파일로 재가공돼 무료 배포된다. 성기완은 “현대 노동의 상징”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프로그램”인 엑셀을 통해, 하이퍼링크를 활용한 일정표 형식을 구현할 예정이라고 했다. <11월>의 실험은 결국 지겹게 살아가는 일상과 언어, 감정의 실재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마치 처음보는 것처럼, 낯설고 매혹적인 매일의 일정표를 통해.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