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서 ‘핫’한 가상인간들

김태훈 기자

모델·가수 등 다양한 분야서 활동… 새 공간 확장하는 주역으로 떠올라

가상인간 ‘로지’가 쓰레기를 줍는 활동인 플로깅을 하고 있다. / 로지 인스타그램

가상인간 ‘로지’가 쓰레기를 줍는 활동인 플로깅을 하고 있다. / 로지 인스타그램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밀라노 패션위크에선 사상 처음으로 가상인간이 패션 모델로 등장했다. ‘캐논(KANON)’이라는 이름의 이 가상인간은 세계 4대 패션위크로 꼽히는 밀라노 패션위크 중 열린 한 행사를 통해 실제 인간들과 만났다. 밀라노 중앙역 인근에 만들어진 행사장에 참석한 관객들은 가상현실 스마트 안경 너머로 구현된 가상 패션쇼 런웨이를 당당하게 걷는 가상인간 패션모델을 볼 수 있었다. ‘캐논’은 올해 열릴 밀라노 패션위크에선 전부 가상인간 모델들만 등장하는 메타버스 패션쇼 행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지난해 캐논이 등장한 밀라노 패션위크의 ‘유니콘 패션 어워드’는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그간 패션모델 역할을 맡기 어려웠던 다양한 소수자들에게도 차별없이 문호를 개방하는 행사다. 인간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취지의 행사에 마침내 실제 인간이 아닌 가상의 인간도 참여하게 된 것이다. 메타버스 기술을 활용해 만든 캐논은 대체불가능토큰(NFT) 기술을 통해 가상 자산 공간으로도 존재 영역을 넓혔다. 가상인간이라는 존재가 메타버스, 인공지능, NFT 등 첨단 기술과 만나 새로운 공간을 열어젖히는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외서 뜨거운 인기

이미 생활 가까이 훌쩍 다가온 가상인간은 국내에서도 잇달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가장 쉽게 이들을 만날 수 있는 분야는 광고모델이다. 2020년 국내 최초로 등장한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는 처음에는 자신이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소셜미디어(SNS) 인스타그램을 통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로지는 4개월 뒤에야 가상인간 모델임을 밝혀 그를 실제 인간으로 여겼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면을 통해 드러난 그의 외모와 표정, 움직임만 봐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분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가상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 가상인간 모델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역이 광고·홍보 분야인 것도 이들을 구현하는 기술이 내세우는 장점과 해당 산업의 수요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매력을 뽐내는 외모의 실제 인간 모델을 굳이 비싼 모델료를 줘가며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광고주 입맛에 맞게 구현 가능하다는 점이 대표적인 장점이다. 국내 대표적인 가상인간 모델 로지는 지난 1년간 100곳이 넘는 각종 광고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지명도 높은 버추얼 인플루언서이자 가상인간 모델인 릴 미켈라(Lil Miquela)는 2020년 한해 수익만 약 130억원에 달했다. 2016년 처음 등장한 이후 샤넬, 프라다 등 유명 브랜드 모델로도 활동하며 300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실제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가상인간을 구현해내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대중에게 이런 존재가 낯설지만은 않다. 20여년 전인 1998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이버 가수 아담’이 대표적이다. 현시점에서 보면 그래픽뿐 아니라 가상인물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갖다붙인 상세한 설정이 다소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을 구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아담’을 탄생시킨 아담소프트에 몸담으며 아담의 정체성을 기획한 바 있는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그때는 이미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보듯 컴퓨터 그래픽이 어느 정도 발전했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해서 미묘한 차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구현하는 게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고 말했다.

아담에 앞서 일본에서 1996년 세계 최초의 가상 아이돌인 다테 쿄코를 공개한 데 이어 세계 각국에서 비슷한 가상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 평론가는 “한국에서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서 상당한 비용과 기술적 과제가 있었음에도 도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로선 앞선 기술이었던 모션 캡처를 활용하는 등 최대한 위화감을 줄이고 실제와 비슷하게 만들고자 했으나 보다 움직임과 표정이 복잡한 배우 대신 가수 역할로 만족해야 했던 것도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

■스스로 노래도 부를 수 있어

물론 현재의 가상인간에게도 실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기대할 순 없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로지’ 외에도 롯데홈쇼핑이 1년간의 개발과정을 거쳐 만든 가상인간 ‘루시’나 LG전자가 선보인 23세 가상 여성 아티스트 ‘김래아’ 등 마케팅 모델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상인간들에게 진짜 사람처럼 대화와 의사소통을 기대하긴 어렵다. 다만 현재의 가상인간 모델이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한계는 구현할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굳이 비용을 들여 해당 기능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한 인공지능 개발업체 관계자는 “현재 흔히 쓰이는 챗봇처럼 가상인간에게도 실제 인간과 대화형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기능을 부여하는 건 어렵지 않다”면서 “가상인간이 말하는 각각의 문장과 그래픽을 하나하나 연결할 때 비용이 상당히 들어가기 때문에 개발사로선 필요를 못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다양한 변수가 개입되는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일일이 만들어내기가 어려울 뿐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건 진짜 사람이 맡았던 사이버 가수 아담 때와는 달리, 최근의 가상인간은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을 통해 가상인간 스스로 노래 부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큰 변화를 보인다. LG전자가 기획한 가상인간 ‘김래아’는 연내 첫 데뷔 앨범 출시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LG전자 관계자는 “래아가 현재 자작곡을 준비 중”이라며 “음반 작업을 비롯해 향후 인지도가 높아지면 광고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인간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는 있으나 한편으로 가상인간을 포함한 메타버스 공간이란 전체 개념이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덕현 평론가는 20여년간 꾸준히 이뤄낸 기술의 발전만으로도 질적인 차이는 크다고 말했다. 그는 “메타버스와 그 가상공간에서 활동하는 가상인간의 향후 가능성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과거보다 현저하게 발전한 기술 덕에 실제 경험과 흡사한 실감나는 느낌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보다 더 빠르게 실재와 가상이 융합될 미래에는 우리가 진부하다고 여기는 그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인간이 이미 현실 속에 상당히 정착했다는 점에서 보다 먼 미래가 아닌 당장 2022년 올해 안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송진 한국콘텐츠진흥원 미래정책팀장은 올해 콘텐츠산업의 변화에 대해 “메타버스 고유의 특성을 활용한 콘텐츠 중 가상인간을 활용한 버추얼 아이돌이나 버추얼 캐릭터, 게임이나 웹툰 캐릭터를 3D로 구현해 현실에서 활동하는 확장 시도도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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