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서로의 글을 읽고 성장을 지켜보며 우린 용기를 길렀다, 그 방에서 함께

이길보라

내 이야기가 세상과 만나는 곳, 글방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와 합평하던 공간, 창의적 글쓰기와 어딘글방의 책상 위 풍경.  이길보라 제공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와 합평하던 공간, 창의적 글쓰기와 어딘글방의 책상 위 풍경. 이길보라 제공

질투·시기·부러움·감탄·놀라움부터
억울함과 시샘, 찰나의 기쁨까지…
내 이야기를 세상에 더 잘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단단히 품고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워크숍 수업에서였다. 기획 단계였는데 정말이지 잘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다루어보고 싶었던 소재를 중심으로 기획안을 썼다. 어떤 피드백을 들을까 긴장되어 괜히 다리를 들썩거렸다. 함께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잘 와닿지는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댔다.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흥미롭고 중요한 이야기인데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누군가는 분명 긍정적인 피드백을 했던 것도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강사도 보완할 부분을 콕 짚어 말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눈물이 쏟아졌다. 잘해내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속상함에 감정이 북받쳤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법, 글쓰기

나는 글을 쓰는 아이였다. 글을 쓰다보면 나를 둘러싼 것들이 조금씩 명확해져서 좋았다. 내가 보았고 느꼈고 생각했던 일을 글로 옮기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학급 문집을 만드니 그동안 쓴 글을 제출하라는 교사의 말에 동시, 그림일기, 산문, 독후감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냈다. 나는 가장 많은 글을 쓴 학생이었다. 교내 글짓기 대회가 있을 때면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두각을 드러냈던 장르는 기행문이었다. 견학을 다녀온 후 더욱더 넓어진 나의 세계를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배낭을 메고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NGO를 둘러보고 자원봉사를 하며 길 위에서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학교 밖에서의 배움을 이어나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중 연세대학교가 서울시로부터 위탁 운영하는 서울시립청소년미래진로센터인 하자센터의 창의적 글쓰기 수업을 알게 되었다.

주어지는 글감에 맞춰 글을 쓰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서로의 글에 대해 돌아가며 합평하는 수업이었다. 수강생 중 다수가 학교를 자퇴했거나 대안학교에 다녔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자주적으로 공부하고 싶은데 어디서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아 불안하던 때였다. ‘나의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개와 고양이의 시선으로 쓰기’ ‘나의 섹슈얼리티’ 등의 듣도 보도 못한 글감을 내어주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명확하고 사려 깊게 의견을 나눴다. 그곳에는 나보다 훨씬 더 글을 잘 쓰고 유쾌하게 풀어내며 합평도 맛깔나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배우기로 했다.

수업 말미에 제시되는 글감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주일을 꼬박 다 바쳐도 모자랐다. 같은 주제를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썼는지 자료 조사를 하며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만의 방법으로 글감을 소화하기 위해 고민하고 고심하며 침잠했다. 마감일이 닥치면 쓰고 싶지 않은 마음과 쓰고 싶은 마음 사이를 오가며 썼다. 도저히 이어지지 않는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사이를 이으며 퇴고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면 같은 글감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인 글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다른 이가 쓴 글을 잘 읽어내야 자신의 글도 잘 쓸 수 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집에서 하자센터까지는 왕복 5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좋았다. 일주일 내내 수업 시간만 기다리며 공부하고 읽고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어른이 몇 학년인지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학교 안 다니는데요”하고 말하자 열차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제가 학교를 왜 안 다니냐면요,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한국의 입시중심 교육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자퇴하고 여행을 갔고요…. 구구절절 설명하다보니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현타’가 왔다. 사실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청소년에게 으레 묻는 질문을 한 걸지도 모르는데 나는 나의 위치를 ○○고등학교 ○학년, 자퇴생, 탈학교청소년, 홈스쿨러 같은 단어로 설명할 수 없어 인생사를 전부 설명하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글을 썼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 과정을 책으로 엮었다(사진). ‘로드스쿨러’(Road-schooler)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학습공간을 넘나들며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청소년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스승이 있는 공간이면 세상 모든 곳이 배움터라고 여기는 자기주도학습자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며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봤다. 어떤 이유로 학교를 자퇴했는지, 학교 밖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 지금의 대학은 진정한 배움의 공간인지, 우리를 둘러싼 불안은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쓰고 기록했다. 쓰기 위해서는 알아야 했다.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글쓰기와 합평을 이정표 삼아 어디까지 어떻게 쓸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바라보고 뒤집어보는 법을 배웠다.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15)서로의 글을 읽고 성장을 지켜보며 우린 용기를 길렀다, 그 방에서 함께
2015년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서 진행된 어딘글방의 모습(위 사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어딘글방’에서 자란 이길보라 작가, 하미나 작가, 양다솔 작가가 합동 북토크를 하는 모습(아래).  이길보라 제공·동아시아 유튜브 캡처

2015년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서 진행된 어딘글방의 모습(위 사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어딘글방’에서 자란 이길보라 작가, 하미나 작가, 양다솔 작가가 합동 북토크를 하는 모습(아래). 이길보라 제공·동아시아 유튜브 캡처

글방이지만 어떤 것이든 합평했던 공간

어딘(김현아 작가)의 창의적 글쓰기 수업은 하자센터 내부 개편으로 어딘 개인이 운영하는 글쓰기 수업이 되었다. 우리는 그곳을 ‘어딘글방’이라 불렀다. 나를 포함한 10대들은 20대가 되었다. 누군가는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 비진학 청년이 되어 학교 밖에서의 배움을 이어가는 이도 있었다.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고 유학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글방에서 모였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글을 쓰는 훈련을 지속했다.

나는 오랫동안 부모와 나에 대해 썼다. 입술 대신 손으로 사랑하고 슬퍼하는 농인 부모와의 경험을 지겹도록 썼다. 부모의 캐릭터를 잘 살려 수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리는 데 성공할 때면 장애가 결여와 손상의 의미가 아니라 또 다른 감각을 상상해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는 평을 들었다.

매번 성공했던 건 아니다. 비장애중심사회의 편협함을 꼬집으며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고 분노에 차 뜨겁게 글을 써오던 날이면 도덕 교과서를 읽는 것 같아 재미가 없다거나 대상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한 글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럴 때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붉어진 얼굴로 너희가 장애와 차별을 아냐며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기에 다음번에 기필코 더 잘 쓰리라 다짐했다.

글방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 가족, 사랑, 연애, 섹슈얼리티 등에 대해 썼다. 종종 독자를 홀리는 글들도 가져왔다. 누군가 섹시하고 재밌고 유쾌한 글을 가져올 때면 부러움이 솟았다. 잘 썼다며 호들갑을 떨고 싶었지만 질투가 나 최대한 건조하게 칭찬하고는 보완해야 할 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보라는 가족 이야기를 써도 부모님이 농인이라 모든 게 새롭고 낯설게 그려진다”며 부럽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면 좋아해야 할지, 그럼 너도 장애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라고 답해야 할지 헷갈렸다. 글방은 질투, 시기, 부러움, 감탄, 놀라움, 기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글방에서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글방은 글쓰기를 훈련하는 곳이었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이에게는 타인의 시선을 빌려 글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각종 프로젝트 기획안을 써야 하는 이들에게도 그랬다. 또한 문학상 공모 제출을 앞둔 글들이 거쳐 가는 곳이기도 했으며 편집 중인 영화를 함께 보고 의견을 주고받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글방의 구성원은 친구, 동료가 되어 글쓰기로부터 출발한 각자의 프로젝트와 행보를 응원하며 지지했다.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15)서로의 글을 읽고 성장을 지켜보며 우린 용기를 길렀다, 그 방에서 함께

재능보다 성실함보다 용기

나는 어딘글방을 졸업하고 보라글방을 운영한다. 진득하게 글을 쓰며 성장했던 그 공간을 직접 열기로 했다. 동료 작가가 하던 방식을 빌려 8주간 운영되는 합평 중심의 글쓰기 수업을 한다. 위치를 바꾸어보니 보이는 것이 있다. 한 주간 쓸 수 있는 최선의 글을 가지고 와 무슨 말을 들을지 조마조마해하는 표정, 어떤 비평을 해야 상대방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얼굴, 다음주에는 기필코 더 잘 쓰리라 다짐하며 앙다문 입술, 성공한 시도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쁨에 찬 눈빛 같은 것들. 나 역시 그랬다. 글쓰기 수업과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을 마치고 느꼈던 억울함과 시샘, 찰나의 기쁨은 창작의 과정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더 잘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들이었다.

김밥을 입에 물고 허겁지겁 달려 열차에 올라타 노트북을 펴고 글을 퇴고하고, 불이 꺼진 캄캄한 고속버스에서 하드 드라이브를 연결하여 이동 중에도 영화를 편집하던 때를 떠올린다. 나의 이야기를 독자와 관객에게 전하는 법을 찾아 헤맸던 여정의 시작에는 글방이 있었다.

글쓰기 수업과 글방에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이들이 모인다. 돌아보면 ‘글’이 아니라 ‘방(房)’에 방점이 찍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담대하고 총명한 여자들이 협동과 경쟁과 연대의 시간을 쌓는 곳, 어딘글방’이라는 부제를 단 책 <활활발발>(사진)에서 어딘은 “글을 쓰는 일은 재능보다, 성실함보다,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쓴다. 관습과 지식과 정치와 경제와 윤리의 체계를 의심하며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가 작가이며 글방은 이러한 위반의 대가를 치를 용기를 ‘함께’ 기르는 공간이라고 말이다. 나와 세상이 만나는 길목에서 친구이자 동료로서 다정하고 사려 깊지만 동시에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라보고 읽고 쓰기를 연습했던 공간, 용기를 함께 기르는 글방을 만들어가고 싶다.

■이길보라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15)서로의 글을 읽고 성장을 지켜보며 우린 용기를 길렀다, 그 방에서 함께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저서로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등이 있고, 연출한 영화로는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이 있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