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평화 메시지, 무대 퇴출···전쟁 이후, 러시아 음악인들의 엇갈린 행보

백승찬 기자

페트렌코, 키신 등 유명 음악인들 푸틴의 우크라 침공 비판

게르기예프, 네트렙코 등은 푸틴과 거리 두기 못해 퇴출

‘러시아인은 무대에 서기 전 푸틴 비난해야 하는가’

보이콧의 한계 두고 논란 이어져

베를린필의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베를린필의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출신 세계적 클래식 음악가들의 행보가 엇갈리고 있다. 어떤 이는 명확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냈지만, 어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관계를 해명하지 못해 서구 무대에서 퇴출되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러시아 출신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는 성명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무도한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며, 세계 평화의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행위”라면서 “나는 우크라이나의 동료들과 연대할 것이며, 모든 예술가들이 압제에 대항해 자유, 주권을 지켜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페트렌코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기부를 요청하는 영상도 공개했다.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다른 음악인들이 비교적 간명하게 입장을 밝힌 반면 체코 필하모닉의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는 개인사까지 인용한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조부는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전상을 입었다. 어머니는 나치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과거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려는 노력들이 러시아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역사는 잊혀진다면 결국 반복된다”고 말했다. 비치코프는 “악과 대면했을 때 침묵하면 공범이 될 수 있다. 지금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가치,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의 고귀함에 대한 배신”이라며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했다.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역시 “불행하게도 전쟁을 일으킨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처벌받지는 않지만, 그들 중 누구도 역사의 법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 세대에 기억돼 영원한 피의 범죄자로 남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는 인스타그램에 “모든 전쟁은 비극이다. 음악인으로서 나는 어려운 시기에 위안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고 썼다.

반면 푸틴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 아티스트들은 국제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세계적 명성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빈필하모닉의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서 배제된 데 이어 2015년부터 이끌던 뮌헨 필하모닉에서도 퇴출됐다. 뮌헨시는 게르기예프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반응이 없자 해고했다. 게르기예프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던 마르쿠스 펠스너도 “더 이상 게르기예프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다”며 계약을 종료했다. 러시아 바깥에서 게르기예프의 경력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포디엄의 차르’라 불리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포디엄의 차르’라 불리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공연 역시 잇달아 취소됐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네트렙코가 푸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의사를 철회해야 한다는 메트 오페라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며 네트렙코가 4~5월 푸치니의 <투란도트>, 다음 시즌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서 하차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출신 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가 <투란도트>에서 네트렙코 대신 노래한다.

멀리는 수백년 전의 음악을 비교적 추상화된 언어로 표현하는 클래식 음악계는 현실과 무관해 보이지만, 이곳에서도 정치적 논란이 종종 있었다. 나치 시기 음악 경력을 쌓았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카를 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전후에도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로 활동했지만, 저마다 나치와의 관계, 구체적 행각, 전후의 해명 등으로 각기 다른 논란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음악밖에 모른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많았던 것이다.

게르기예프와 네트렙코의 퇴장을 보는 시선도 다소 복잡하다. 게르기예프와 푸틴의 친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르기예프는 이번 전쟁에 대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게르기예프는 푸틴의 대선 캠페인 지지 연설을 했고, 러시아의 크름반도(크림반도) 병합 지지선언에 서명하기도 했다. 반면 네트렙코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 전쟁에 반대한다. 난 러시아인이고 내 나라를 사랑하지만 우크라이나에 친구가 있고 그들의 고통에 가슴이 아프다”고 밝혔다. 다만 “예술가 등 공인에게 공개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라거나 조국을 비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대목이 문제가 됐다. 지휘자는 다수의 연주자 단체를 이끄는 리더지만, 성악가는 개인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뉴요커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1949년 미국 방문 중 소비에트의 음악적 탄압에 대한 질문에 곤혹스러워한 장면을 들어 “모든 러시아인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연하기 위해선 먼저 푸틴을 비난해야 한다는 생각은 암울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네트렙코가 2014년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분리주의자 깃발을 들고 사진 찍은 것을 언급하며 “네트렙코는 정치인도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녀가 스스로는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정치적 인물’임에 분명하다”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세계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지도자(푸틴)와 관련 있는 예술가들과 계약하는 것은 선을 넘은 일이다. 제재는 국가의 엘리트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다. 제재는 경제적일 뿐 아니라 문화적일 수도 있다”며 게르기예프와 네트렙코의 퇴출을 옹호했다.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자신이 만든 클래식 뉴스 미디어에 “보이콧은 개인적, 재정적으로 푸틴 체제로부터 도움을 받았거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 이들을 향해서만 엄격하게 행해져야 한다”며 “특히 이처럼 끔찍한 시대에 세계는 러시아에 본래부터 있었던 인간애를 살펴봐야 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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