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채우는 대화와 긴장감…일본의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의 마력 '우연과 상상'

고희진 기자

‘우연’ 주제 3개 단편 엮은 옴니버스 영화···내달 4일 개봉

일본의 떠오르는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에는 우연을 주제로 한 3편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겼다. 20년 만에 길거리에서 만난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세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 번’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일본의 떠오르는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에는 우연을 주제로 한 3편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겼다. 20년 만에 길거리에서 만난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세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 번’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다시 한번 하마구치 류스케(44)다. 지난해 12월 말 국내 극장서 개봉한 <드라이브 마이 카>가 5개월째 장기 상영 중인데, 신작 <우연과 상상>도 다음달 4일 개봉한다. ‘우연’을 주제로 한 3개의 단편을 엮은 이 옴니버스 영화는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그의 연출적 특징을 이어가며 하마구치 영화세계의 확장을 모색한다. 하마구치는 칸, 베를린, 아카데미 등 세계 유수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수상하며 현재 일본 영화계의 최전선에 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우연과 상상>에는 세 편의 단편이 담겼다. 등장인물들은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첫번째 이야기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는 메이코와 쓰구미 두 여성이 등장한다. 비즈니스로 인한 만남이면서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한 두 사람이 일을 끝내고 같은 택시에 탄다. 쓰구미는 메이코에게 자신이 최근에 만난 남자 가즈아키에 대해 얘기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관객은 쓰구미가 경험한 “마법과 같은” 만남 얘기에 빠져든다. 10여분 동안 구도의 변화도 없이 화면은 택시 뒷좌석에 앉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은 쓰구미가 내리고 갑자기 변해버린 메이코의 표정이 비치면서다.

이후의 전개는 어떤 면에서 아주 간단하다. 메이코와 가즈아키의 관계가 드러나고 이로 인해 이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쉽게도 줄거리만으로 영화를 요약하자니 이야기가 급격히 가볍고 왜소해진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보다는 등장인물들이 각각 우연한 상황을 마주하고 그로 인해 어떻게 변하는가를 관객이 지켜보는 데 있다. 주로 택시나 사무실 등 특정한 공간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서 그 변화가 드러나는데, 이는 하마구치의 전작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물론 표면적인 대화에 모든 진실이 담겨있지는 않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말하는 이의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난다. 이 같은 연출은 짧은 단편 안에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등장인물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두번째 이야기 ‘문은 열어둔 채로’에는 남교수와 여대생이 등장하는데, 첫번째 이야기보다 내용을 요약하기 더 부담스럽다. 스토리만 짧게 나열하다 보면 흔한 치정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이 단편 역시 교수 사무실에서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 상황 속에서 두 인물 간에 느껴지는 긴장감 자체가 영화의 매력이 된다. 마지막 단편 ‘다시 한번’은 20년 만에 길거리에서 만난 두 동창생의 이야기다. 세 가지 이야기 중 가장 무난한 편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도 낯선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전하는 긴장감은 여전하다.

전반적으로 작은 우연이 상황을 변화시키는 모습,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감정이 세밀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묘사됐다. 이 역시 이전 작업을 통해 감독이 보여준 것들의 연장선이다.

우연을 주제로 3편의 이야기를 담아냈지만, 아직 이야기가 더 남았다고 한다. 하마구치는 <우연과 상상> 개봉 전 제작사와 인터뷰하면서 “우연을 주제로 한 단편은 4편이 남았다. 곧 각본을 완성해 촬영에 들어갈 수도 있다”며 “40대가 끝나기 전에 이 시리즈를 완성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의 주제 속에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형식은 에릭 로메르의 작업들에서 영향받았다고 한다. 에릭 로메르는 봄·여름·가을·겨울 이야기 시리즈로 ‘계절 이야기’ 연작을 만들어 내는 등 하나의 테마를 놓고 하는 작업을 다수했다. 하마구치는 여러 인터뷰에서 에릭 로메르의 팬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앞서 국내에서 정식 개봉한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상영시간은 각각 328분, 179분이었던 반면, <우연과 상상>의 단편 하나는 약 30~40분 정도로 영화의 총 상영시간은 121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에 관심이 있었지만, 긴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관객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접해볼 만한다. 지난해 열린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우연과 상상> 첫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우연과 상상> 첫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