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투자를 말하고 정작 ‘단타’로 치고 빠진 주식 예능 프로그램

위근우 칼럼니스트

불안 부추긴 업자와 열풍 편승한 방송들… 책임은 누가 지나요

[위근우의 리플레이]장기 투자를 말하고 정작 ‘단타’로 치고 빠진 주식 예능 프로그램

“자산운용이 있는 게, (투자를 위해)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까 대신해주는 거군요.” 2020년 7월 초 방영한 SBS <집사부일체>에서 멤버 이승기는 그날의 ‘사부님’이었던 당시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존 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 리 역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시네”라 화답했다. 2년 전의 이 훈훈한 장면을 존 리가 차명 투자 의혹으로 회사에서 자진 사퇴한 현재 다시 보면 의미가 새롭다. 해당 방송을 포함해 당시 ‘한국의 워런 버핏’이라는 과한 타이틀로 수식되던 그가 지상파 예능을 통해 노후를 위한 주식 투자의 필요와 개인투자자의 자산운용사 활용의 필연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가 속한 메리츠자산운용에 대한 노골적 광고인가, 아닌가. 방송으로부터 4년 전, 친구가 운영하고 배우자가 주주로 있는 회사 상품에 배우자 명의로 투자해 이해관계 충돌의 혐의를 받는 그가 올바른 주식 투자의 자세를 이야기하며 ‘사부님’ 노릇을 한 건 기만인가, 아닌가. 어떤 의미로든 당시 존 리 대표는 방송을 사적으로 전유했고 방송은 핫한 게스트를 위해 장단을 맞춰주었으며 지금으로선 민망한 일이 되었다.

<집사부일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집사부일체>로부터 한 달여 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주목을 받은 그는 지난해 1월에는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 새해 부자 되기 특집과 올해 KBS2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도 출연했다. 이처럼 지난 2년간 쌓인 민망함의 리스트를 작성하기란 어렵지 않다. 물론 현재 밝혀진 존 리의 차명 투자 문제를 당시 방송에 소급하는 건 엄혹한 결과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은 존 리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비위를 저질렀고 방송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차명 투자 건이 보여주듯 존 리도 결코 완벽한 투자의 신이 아닌 한 명의 결함 있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데, 방송은 그 당연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그를 신격화했다는 게 진실이다.

유동성 확대가 불러온 ‘불장’ 속
존 리 ‘투자의 신’으로 떠받들어

각국 긴축정책으로 거품 꺼지자
시청률 누린 방송은 ‘손절’할 뿐

동학개미 성적표는 ‘28% 손실’
시청자들의 피해에는 관심 없나

존 리가 신격화되었다는 건 비유가 아니다.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그와 함께 출연한 ‘부자 언니’ 유수진은 존 리를 신계의 인간으로, 자신을 비롯한 투자 전문가들은 그 신의 언어를 인간계 수준으로 번역해 전파하는 입장이라 설명했다. 유명인의 유명인. 구루의 구루. 미디어를 통한 한 인간의 신격화는 무조건 뒤탈이 날 수밖에 없다. 다만 존 리가 투자의 신이 되는 건, 강형욱이 반려견의 신이 되고 백종원이 요식업의 신이 되며 설민석이 한국사의 신이 되고(설민석은 스스로 그 범위조차 넘어서 화를 키웠지만) 오은영이 육아의 신이 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위험하다. 앞서 <집사부일체>에 대해 지적했듯, 커피 사 마실 돈으로 주식을 사라고 강조하는 자산운용사 대표가 신격화될 때, 커피값을 아낀 소액주주들의 돈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메리츠자산운용에 직접 돈을 넣는 대신 존 리의 투자 조언만을 받아들여도 문제는 생긴다. 장기적 안목으로 투자하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존 리의 말은 매우 이상화된 원론일 뿐이다. 그의 말을 따라 주식 투자를 하는 건, 백종원의 레시피를 집에서 따라 하다 망하느냐 마느냐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리스크를 동반한다. 당장 존 리가 이끈 동학개미운동의 현재를 보자. 동학개미라 불리는 국내 증시 개인투자자들의 주요 순매수 상위 10개 기업의 7월 초 평균 수익률은 -28% 수준이다. 앞다퉈 존 리를 섭외해 신탁을 받기 위해 애쓰던 방송들은 여기에 책임이 없을까.

최근 차명 투자 의혹이 불거지자 지난달 말 전격 사임한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동학개미운동’이라고 불린 개인투자자들의 주식투자 열풍을 이끌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명도를 쌓았다. 사진은 <집사부일체> <옥탑방의 문제아들> 출연 당시. SBS·KBS 제공

최근 차명 투자 의혹이 불거지자 지난달 말 전격 사임한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동학개미운동’이라고 불린 개인투자자들의 주식투자 열풍을 이끌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명도를 쌓았다. 사진은 <집사부일체> <옥탑방의 문제아들> 출연 당시. SBS·KBS 제공

최근 ‘시사IN’의 ‘무엇이 2030을 영끌로 내몰았나’라는 기사에선 2020년 팬데믹 기간부터 본격화된 2030세대의 자산시장 투자 열기의 위험성에 대해 되짚은 바 있다. 기사에 따르면 2020년 신규 증권 계좌 총 1818만개 중 40세 미만의 신규 계좌는 1074만개에 달한다. 여기엔 “유동성이 확대되고 자산 가격이 상승하는 동안 자신만 자산을 늘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작동했다. 한국인 중 노후 준비가 안 된 금융문맹이 너무 많다는 존 리의 주장은 정확히 이러한 불안함을 파는 행위였다. 2000년대 초 뉴 밀레니엄의 낙관 속에서 IT 버블의 붕괴를 예견했던 경제학자 로버트 실러는 책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서 버블을 만드는 미디어의 낙관적 전망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존 리를 출연시키고 그의 말을 신격화한 방송은 주식시장에 대한 낙관과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불안감의 양동 작전으로 ‘비이성적 과열’을 부추긴 셈이다. 존 리가 장기적인 가치 투자의 정론을 설파했다는 건 딱히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 존 리 본인과 방송 모두 2020년을 기점으로 한 코로나19 팬데믹과 금리 인하로 인한 유동성 확대의 분위기에 기대 버블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엔 존 리가 출연하지 않은 카카오TV <개미는 뚠뚠>, MBC <개미의 꿈> 같은 주식 예능 프로그램도 공모했다. 버블이 꺼지고 인플레이션으로 각국 중앙은행이 긴축에 나서자 방송계의 주식 열풍은 잠잠해졌다. 존 리를 섭외하고 주식을 주제로 하던 예능들은 장기적 투자를 강조했지만, 정작 프로그램 각각은 ‘단타’로 치고 빠졌다.

동학개미운동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자산시장 활성화 시기에 그럴싸한 내러티브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인용한 로버트 실러는 최근작 <내러티브 경제학>(Narrative Economics)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바꿀 수 있는 전염성 강한 이야기”를 ‘경제 내러티브’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비트코인에 대한 대중적 열광에는 “아나키스트 정신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내러티브”의 힘이 작동한다. 동학개미운동 역시 개인 경제활동의 포트폴리오에 주식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꽤 평범한 주장을 동학운동에의 비유와 그걸 이끄는 ‘존봉준’(존 리+전봉준)의 흥미롭고 어쩐지 전복적인 내러티브로 구성해 전염성을 만든 사례다. ‘한국의 워런 버핏’이란 자막이 한국 방송의 주접이라면, ‘주식개미들의 영혼의 파트너’(유 퀴즈 온 더 블럭), ‘개인투자자들의 투자 전도사 존봉준’(집사부일체) 같은 자막은 경제 내러티브에 대한 적극적 가담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지난 2년간 존 리를 활용해온 예능의 방식을 단지 섭외의 안일함과 무지 정도로 볼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얼마 전 공인중개사 사칭으로 논란이 된 부동산 전문가 박종복이 출연한 <집사부일체>, <옥탑방의 문제아들>, KBS2 <자본주의학교>, MBC <라디오스타>의 사례를 보라. 좀 유명해지고 타 방송사에 나오면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너도나도 섭외하는 게 무책임한 일이라면, 박종복이 직접 용산구의 가격 상승을 예견하거나(자본주의학교), 3년 만에 26억원의 시세차익을 냈다는 말에 MC와 나머지 게스트 모두가 감탄하는(라디오스타) 장면은 부동산 버블을 정당화하고 상대적 빈곤감과 불안함을 자극하는 적극적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주식 예능을 포함해 자산시장 버블 형성 및 유지를 위한 자기실현적 예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 거품이 터진 자리에서 피해는 불공평하고 양극화될 확률이 훨씬 높다. 과연 이들 방송은 짧은 잔치, 어쩌면 고연봉 방송 제작자나 인기 연예인까지는 누릴 잔치가 끝난 뒤 남게 될 피해의 흔적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거나 책임감을 느끼기는 할까. 하다못해 존 리와 박종복의 현재 상황을 보며 섭외와 연출에 대한 자기반성이라도 할까. 알 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해당 방송들의 시청률 거품이 싹 다 빠지는 것이 모두에게 더 나은 일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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